개성 영통사 복원사업

- 사진으로 보는 그 때, 그 순간 -

'사진으로 보는 그 때, 그 순간' 코너는 사회문화 분야 대표적인 남북 협력 사업 관계자를 찾아가 당시 사업의 사진들과 함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인터뷰로 천태종의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을 소개해주실 분으로 (사)나누며하나되기 진창호 사무처장을 인터뷰했습니다.

(사)나누며하나되기는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대한불교천태종에서 설립한 NGO입니다. 진창호 사무처장님은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 당시 복원불사단장이셨던 무원스님의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영통사 복원 전 사진

Question

2003~2005년 진행된 천태종의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은 남북 종교교류의 상징적 사례로 회자됩니다. 영통사는 역사적이나 종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사찰인가요?

개성 영통사는 고려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발전한 국가적 사찰로, 한국 불교사와 천태종의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찰입니다.

개풍군 오관산 자락 '마하갑'이라 불린 골짜기에 위치한 영통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 보육의 뜻을 받들어 창건된 사찰로, 처음에는 '승복원'이라 불렸고 이후 ‘영통사’로 개칭되었습니다. 이곳은 고려 왕씨의 발상지로 여겨지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국가 제사를 지내는 중심 사찰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대각국사 의천이 1065년 이곳에서 출가하고 입적한 사실은 영통사를 한국 천태종의 성지로 격상시켰습니다. 의천의 유적인 묘실 터, 부도 등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뒷받침합니다.

고려를 대표하는 대규모 사찰로서 불교 학문과 의례의 중심지였던 영통사는, 안타깝게도 이후 정확한 이유 없이 폐사되었습니다. 다만, 1671년 김창협의 『송도유람기』에 따르면 이미 당시 영통사는 화재로 주요 건물이 소실된 상태였으며, 일부 부속건물과 석탑, 비석만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7세기 무렵 화재로 인한 소실이 유력하게 추정됩니다.

이처럼 영통사는 단순한 종교시설을 넘어, 고려 왕실의 정신과 한국 불교의 맥을 잇는 역사적 상징이자, 남북 종교교류의 거점으로 복원 가치가 매우 큰 사찰입니다.

영통사 복원 전 사진

Question

천태종은 어떻게 북측과의 협의를 통해 복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천태종의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은 자연재해와 역사적 인연, 북측의 요청, 그리고 종교적 사명감이 맞물리며 성사된 남북 종교교류의 대표 사례입니다.

1995~1996년, 북측은 대규모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영통사터의 흔적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북측은 1997년부터 일본 다이쇼대학과 공동으로 발굴에 착수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발굴을 지시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발굴은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었으며, 연인원 3만 명이 동원될 만큼 대규모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북측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해 복원 작업을 독자적으로 이어가기 어려웠고, 결국 외부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재일교포 최준 씨와 조총련 인사들이 일본 다이쇼대학의 부탁을 받아 천태종 총무원장을 방문하면서 복원지원 요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천태종은 영통사 복원이 천태종의 성지를 되찾는 기회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지원 의사를 구두로 전달하며 남북 종교협력의 실마리가 열립니다.

북측은 천태종의 의향을 확인한 후, 현지 조사를 허용했고 2000년 11월, 총무부장 덕수스님을 단장으로 한 천태종 방북조사단이 개성 영통사터를 방문하게 됩니다. 조사단은 오관산의 수려한 경관과 대규모 도량의 유적을 직접 확인하며 복원의 필요성과 가치를 체감합니다. 이 답사는 본격적인 복원사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후 천태종과 북측은 신뢰를 바탕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나가게 됩니다.

Question

당시 무원스님이 개성영통사 복원불사단장이셨는데요. 북한과의 교류 과정에서 무원스님께서 느꼈던 첫 인상이나 감정을 전해 들으셨다면 말씀해주세요.

무원스님은 '마음'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목적사업이라는 것은 뒤로 하고 정을 쌓는 이야기와 친구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2000년 첫 현장 답사 이후 영통사 복원 사업이 완성되는 데 총 5년이 걸렸습니다.

소통을 통해 협의가 이루어지고 실제로 복원사업을 진행한 기간은 2003년부터 3년간이었지만, 착수부터 마무리까지 5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북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정을 나누게 되고 한민족이라는 유대감 속에서 순조로운 복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Question

무원스님께서는 몇 차례 북한에 방문하신 거지요?

약 4년 동안 해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셨습니다. 무원스님께서는 갈 때마다 2박 3일 일정, 또는 1박 2일 일정으로 사라져 가는 문화를 재현한다는 마음으로 진행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문화를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풀어나가는 자세를 지향하며 일관되게 그들을 껴안고자 했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유형의 집을 짓는 일도 중요하지만, 북한 사람들의 마음에 등을 밝힌다는 마음으로 복원사업에 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스님 부도탑

영통사 건축마감재 전달식 사진

영통사 물자 지원 사진

Question

복원 현장에서의 고비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소개 부탁드려요.

개성 영통사 복원 과정에서는 기대와는 다른 난관과 극적인 돌파가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특히 북측과의 협의와 자재 지원 과정에서 수차례 고비가 있었습니다.

2000년 11월 첫 현장 답사 이후, 천태종은 북측에 물자 지원 의사를 밝혔고, 양측은 위원회를 구성해 협의하기로 했지만, 실제 협상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북측이 수백억 원대의 현금지원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난항에 빠졌고, 천태종은 현금 사용처의 불투명성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며 협의는 일시 중단됩니다.

그러나 이후 천태종과 재일동포, 해외 인사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2003년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과의 협상이 재개되었고, 1~3차 회동을 통해 기와와 건축자재를 중심으로 한 현물지원 원칙이 합의됩니다. 결국 3차 회동에서 기와 40만 장 지원에 대한 정식 합의서가 채택됩니다.

가장 큰 고비는 이 기와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의였습니다. 북측은 해상 운송(인천항→남포항)을 원했지만, 천태종은 기와 파손 우려와 비효율성을 이유로 경의선 육로 운송을 주장합니다. 수십 차례 조율 끝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 지시로 2003년 10월 17일 남측 복원 자재가 판문점을 통해 개성으로 운송되는 역사적 합의가 성사됩니다. 이는 남북 분단 이후 종교적 목적으로 경의선 육로를 공식 사용한 첫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 극적인 협상 타결은 단순한 자재 지원을 넘어 남북 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순간이었고, 천태종에게도 불심과 사명을 실현하는 감격의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영통사 기와 지원 사진

Question

복원불사단장으로서 무원스님께서는 초청장을 수령하셨을 때의 안도감과 감회가 남다르셨겠어요.

물론입니다. 그야말로 밀고 당기기를 한 것인데,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들의 진심을 읽은 것이었지요. 무원스님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들이 입장과 마음을 열 수 있는 얘기를 했고 만찬을 나누면서도 은근하게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고 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하면서 정말로 나의 가족, 동족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대했더니 그들도 진심을 바로 알더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 본래의 마음이 통했던 겁니다.

영통사 조감도

영통사 복원 공사 사진

영통사 복원 공사 사진

낙성식 사진

Question

영통사 복원이 마무리 되어가는 2004년 11월 16일 영통사에서 최초의 남북 공동 대각국사 열반대재를 봉행했는데, 이 행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2004년 11월 16일, 복원이 마무리되어 가던 영통사에서 남북이 함께 봉행한 대각국사 의천 열반대재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남북 불교계가 한마음으로 역사와 정체성을 되새긴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영통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하고 입적한 천태종의 종조 사찰이자 뿌리 사찰로, 한국 천태종의 정체성과 역사의 원류가 시작된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각국사 열반대재는 종조의 뜻을 기리고 천태종의 계보를 확인하는 역사적 의례였으며, 복원된 성지에서 천태종이 마땅히 지내야 할 당연한 제사였습니다.

특히 이번 행사는 남측 천태종과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주관한 첫 의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는 남북 종교가 정치·이념을 넘어 공동의 정신적 유산을 기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례이자, 실질적인 남북 불교 교류의 상징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천태종은 이 열반대재를 계기로 영통사 복원에 이어 국청사 복원까지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우며, 천태종 정체성 복원과 남북 불교 교류의 연속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낙성식 사진

Question

2005년 10월에 역사적인 영통사 낙성식이 성대하게 거행되는데요, 영통사 복원불사단장으로서 당시 무원스님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2005년 10월, 역사적인 영통사 낙성식을 맞이한 무원스님은 복원불사단장으로서 깊은 감회를 느꼈습니다. 특히 낙성 이전 북측에서 먼저 부처님오신날 4·8등을 밝힌 일은 종교문화에 익숙지 않은 북측 인사들에게 불교의 전통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님, 등 달고 이게 등이 뭐하는 거요?" 라고 북한 사람들이 무원스님에게 묻자 무원스님은 등을 달고 촛불을 밝히며 "절집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묵묵히 불교문화를 전했고, 이후 북측도 조선불교도연맹 중심으로 행사에 적극 협조하게 됩니다. 남북이 종교 전통을 서로 배려하며 모양을 갖추어 간 소중한 경험이자, 신뢰가 쌓여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단청 복원 완료된 영통사 사진

영통사 전경 사진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스님 열반 다례제 법회 사진

Question

2007년 5월 29일 영통사 성지순례법회가 시범 사업으로 출발하게 되는데요. 이 법회 준비를 위한 북한 측과의 협의 과정 상황에서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이 있었으며, 그리고 이 성지 순례 시범 사업이 지닌 불교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2007년 5월 29일 영통사 성지순례법회는 남북 간 첫 불교 성지순례 시범사업으로, 단순한 순례를 넘어 종교·문화·관광이 결합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천태종 입장에서는 성지가 대부분 북측에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컸고, 통일 불교의 실천적 행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북측과의 협상에서는 입장료 문제와 종교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 어려움으로 작용했고, 남측에서도 행정 절차와 협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제약 사항이 있었습니다. 특히 입장료는 북측 요구가 지나치다는 판단 아래, 무원스님이 북측을 설득해 300달러에서 50달러로 대폭 인하시킨 것은 상징적인 성과였습니다.

이 사업은 염주, 단주, 목탁 등을 북측 인사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남측의 종교문화를 소개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되었고, 북측 인사들에게도 큰 신선함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스님 열반 다례제 법회 사진

Question

무원스님께서 남북 교류 과정에서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다면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원스님은 마음의 통일, 즉 '정이 통하는 통일'을 강조하셨습니다.

국토나 경제, 문화 통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서로의 마음이 공감하고 정이 오가는 인간적인 관계 회복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수성의 시대인 지금, 이웃처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며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통일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스님의 깊은 뜻입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통일을 수단화하거나 업적화하는 접근보다, 순수한 인간성에 바탕한 상호 신뢰와 정서적 공감을 통해 통일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간절히 호소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