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즌 2 - 제 4 편
함경북도 부령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함경북도 부령군이다. 이곳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곳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이다. 부령군은 태백산맥의 품안에서 펼쳐진 산과 맑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계절 내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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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군의 기후는 냉대기후에 속하고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한월인 1월의 평균기온은 -9.1°C로 위도(북위 42도)에 비해 꽤 추운편이지만 그래도 인접한 회령시와 무산군보다는 3~4°C 정도 더 높다. 부령군이 회령시나 무산군보다 더 따뜻한 이유는 마천령산맥과 함경산맥 동쪽에 있어서 두 산맥이 북서풍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다만 동해의 영향을 받는 청진시보다는 추운편이다.
부령군의 사계절 중 봄은 특히 아름다웠다. 따스한 햇살 아래 산에 벚꽃과 철쭉이 만개하고, 들판은 푸른 풀밭과 꽃으로 가득 찼었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소풍을 많이 가곤 했다. 진달래 꽃을 머리에 잔뜩 꽂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으면서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웃고 떠들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름이 오면 맑은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피하고, 가을이 오면 붉고 노란 단풍들이 산 전체를 물들였다. 또 산에서는 다양한 과일을 따먹을 수 있다. 개복숭아가 먹고 싶으면 산에 가서 따먹고, 머루와 다래가 먹고 싶으면 친구들과 깔깔깔 웃으며 산에서 먹던 기억도 생생하다. 겨울에 한번 온 눈은 잘 녹지 않는다. 그리고 눈이 오면 어른 허리만큼 올라온다. 소복이 쌓인 눈은 마치 동화 속 세상처럼 변해버린다. 그때마다 나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번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해주셨던 부츠가 눈에 빠져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얀 눈 속에서 부츠를 찾느라 학교 수업도 늦었던 기억이 난다.
함경북도 청진시(수성, 송평, 나남일대는 제외)도 원래 부령군 땅이었다. 1910년 부령군 전체가 청진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청진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지역을 다시 부령군으로 분리시켰다. 일제시대에는 거의 1,900㎢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큰 군이었다. 한국의 홍천군이나 제주도 전체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이었고 심지어 그때는 바다에 접해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1952년에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여기 잘리고 저기 잘리고 하면서 크기가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크게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청진시 부령구역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다가 현재로 굳어진 것이다. 바다에 접해있던 청암면, 연천면, 부거면, 삼해면, 관해면을 모조리 청진시 청암 구역에 넘겨주면서 크기가 매우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군 면적의 절반 이상이 결딴났으며, 그나마 남은 3개의 면 중 서상면의 절반이 또다시 무산군에 이관되는 바람에 현재의 부령군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군으로 전략해 버렸다.
부모님은 항상 신선한 농산물을 재배하시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고, 그 속에서 자라는 법을 익혔다.
특히 부령군 금강리는 자원도 풍부해 송이버섯과 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고향을 찾았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십 명씩 와서 송이버섯과 금을 채취해서 가곤 했다. 금강리에서 20년 넘게 사신 아버지는 어느 산으로 가면 송이가 많이 나오는지 송이밭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송이철이 되면 새벽 일찍 나서곤 하셨다. 오전 11시쯤 산에서 내려오신 아버지는 송이버섯을 광주리에 많이 따오셨다. 송이철이 되면 일본으로 수출하는 기업소에서는 금강리 입구에 항상 차를 대기시켰다. 산에서 따온 송이버섯은 양복기지와 설탕, 기름 등 생활용품과 바꾸곤 했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송이철만 되면 아버지 덕분에 먹을 것이 차고 넘쳤던 것 같다. 사람들은 대부분 송이철이 되면 이 자원을 활용하여 생계를 이어간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에게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과거의 고향의 상쾌한 공기와 자연의 소리, 친구들과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의 고향은 자랑거리가 너무 많았었다. 산골을 개척해 원료기지사업소를 만들었는데 땅에는 돌이 많았다. 금강리 원료기지사업소 작업반장이셨던 아버지는 몇십 년간 땅을 가꿔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작업반이 안돌아갈 정도로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크셨다. 우리집 앞에는 정원처럼 큰 밭이 있었는데 채소가 잘 자란다. 또한 부령군에는 야금공장이 있었다. 야금공장에서 버려졌던 철들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에게는 귀한 보석처럼 자리매김했다. 버려진 철들은 땅속 깊이 파묻혀있었는데 사람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철을 캤다. 땅굴이 얼마나 깊은지 그 밑에서 철을 줍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저러다 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위험할 텐데' 하는 걱정도 했던 것 같다. 철은 중국에서 수입해 간다고 한다. 밀수입자에게 싼값에 철을 넘기면 현금이나 쌀, 밀가루 등 물건과 거래를 한다고 했다.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을 받으면서 나의 고향 부령군에서 성장하였지만, 고난의 행군과 고난의 강행군을 거치면서 나는 고향을 뒤로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함경북도 부령군은 나의 마음속에 항상 특별한 자리로 남아 있다. 그리운 고향의 산과 강, 그리고 부모님을 포함한 따뜻한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준다. 부령군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삶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이곳의 향기와 기억은 영원히 나와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