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달리다'

가장 폐쇄된 나라에서 마주한 작은 순간들

올해 초,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다가 Koryo Tours(고려투어)의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제31회
평양국제마라톤 참가 신청하세요."

북한이 다시 국경을 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선에 외국인 입국을 잠깐 허용했다가 금방 다시 막아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인플루언서들이 너무 많아서' 닫았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확인된 것은 없었다.

코로나 이후 북한은 철저히 폐쇄되어 있었다. 나의 북한 방문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월에 한 번 방문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러시아인만 극히 제한적으로 입국이 허용되었다. 참가신청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왔다.

Van Genugten
Bart Hendrina Maria
(유튜브 채널 'iGoBart' 운영자)

나는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여행 유튜버다. 서울의 467개 모든 동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활동 덕분에 서울시 명예시민이 되었다.

지금까지 열세 명이 넘는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인터뷰했고, 전공은 인간지리학이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배워온 것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였다. 탈북자 친구들과의 인연을 통해 북한 체제의 현실과 탈북의 이유를 생생하게 들었다.

언론은 늘 미사일이나 기괴한 정책에 집중하지만, 그 뒤에는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일어나고, 일하러 가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엔 더 나은 한국어 실력과 문화 이해를 갖고, 다시 북한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배경이 오히려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고, 한국인 아내가 있으며, 미디어 출연도 꽤 했고, 탈북자 인터뷰도 해왔다. 과연 비자를 받을 수 있을까?

Koryo Tours(고려투어), NK News 친구들, 아내와도 긴 대화를 나눴다.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블랙리스트면 그냥 비자가 안 나와요. 신청이나 해봐요." 그래서 신청했다.베이징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2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비자를 받을 예정이었고, 나는 마라톤 참가를 위해 훈련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풀코스나 하프 대신 10km를 선택했지만, 나름 의미는 있었다.

베이징까지는 아내가 동행했었고, 북한으로는 혼자 떠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Koryo Tours(고려투어)의 오리엔테이션 장소이기도 했다. 2019년과 마찬가지로 규칙은 여전했다. 군사 시설이나 공사 현장은 촬영 금지,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종교나 선정적인 자료 금지, 책도 가져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지도자 사진은 반드시 머리까지 전부 찍어야 했다.

비자 발급을 기다리면서도, '과연 내가 비자를 받을 수 있을까?' 큰 의문이 들었다.

그날 아침,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호텔 로비에 줄지어 여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리기보다는 촬영 장비에 집중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2019년 방문 이후 인플루언서 문화가 확실히 많이 달라진 듯했다. 내 차례가 되었고, Koryo Tours(고려투어) 직원이 나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비자가 있었다. 놀라웠다. 여권에 북한 비자가 찍힌 게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소식을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에게 전했고, 모든 것이 현실로 느껴졌다.

공항에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는 한국으로, 나는 북한으로.

Air Koryo(고려항공) 체크인 카운터에 갔는데, 맞은편에는 대한항공이 있었다.

내 탑승구는 28번. 사람들은 러시아산 북한 비행기를 보기 위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흔한 일이 아니니까.

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가슴에 단 김일성 배지 덕분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내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비행기도 바로 옆 27번 게이트에서 출발이었다. 나는 그녀를 불러서 속삭였다.

"Hwia, 너 뒤에 있는 사람들 다 북한 사람이야."

아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웃으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고, 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승무원들이 촬영 금지를 당부했다. 그래도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사람들은 몰래 카메라를 들었다. 들키면 삭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안전 영상, 구토 봉투, 선전 음악과 영상, 그리고 유명한 고려버거. 평판과 달리 맛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꽤 만족해했다. 10점 만점에 8점쯤.

작년 날짜가 찍힌 영어 신문을 나눠줬지만, 나는 오늘 자 북한 신문을 어떻게든 손에 넣었다. 남한 대통령이 하루 전날 탄핵된 상황이라, 북한 신문에 언급될지 궁금했다. 6면 구석에 조그맣게 실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입국 심사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직원은 단 하나만 물었다. "왜 조선말을 배우오?" 나는 내가 한국어를 배우는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도착장에는 가이드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완전히 동행해야 했다. 어디를 가든, 그들도 함께였다. 놀랍게도 그중 한 명은 소영 씨였다. 마이클 페일린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인물이고, 2019년에 나와 함께했던 가이드이기도 했다. 처음엔 날 기억하지 못했지만, 곧 떠올렸고, 다시 금세 가까워졌다. 다른 그룹의 가이드 중에도 2019년에 만났던 분이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참 반가운 순간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며 주차된 차량을 보았다. 토요타, BMW. 예상과는 달랐다. 하지만 이곳은 평양이고, 북한 중산층 이상이 사는 곳이니 그럴 법도 했다. 우리는 스포츠 거리에 있는 서산호텔로 향했다. 거리 풍경을 살피며 변화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몇 채, 늘 있는 선전 포스터, 그리고 김 씨 일가의 초상화와 벽화. 확실히 북한에 도착한 게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김일성 경기장으로 갔다. 마라톤 당일이었다. 긴장한 분위기였다. 수천 명의 평양 시민들이 경기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소영 씨에게 물었다.

"다들 표 샀어요?"

"그럼요. 오늘 축구 경기도 있거든요.”

"누가 해요?"

"공화국 대 공화국이요." 라며 웃었다. "내전 같은 거죠."

북한 특유의 경찰들이 군중과 우리 사이에 서 있었다. 녹색 제복, 큰 모자, 웃음기 없는 얼굴.

우리는 각 거리별로 그룹을 나누어 추운 아침 공기 속에 대기했다. 갑자기 경기장 안에서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사 속에 '김정은'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 순서가 되었다. 우리는 트랙 위로 걸어 들어갔다. 5만 명의 북한 관중이 박수치고 노래하며 완벽한 하모니를 이뤘다. 북한 선수들은 완벽히 정렬된 채 입장했고, 외국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광고판도 눈에 띄었다. 생수, 휴대폰, 교육 기부 앱. 북한에서 광고라니, 놀라웠다.

우리는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 앞에 서서 개막 연설을 들었다. 압도적이었지만, 아드레날린 덕분에 괜찮았다.

이윽고 출발선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10대 북한 마라토너들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실력자들이었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마자 금세 사라졌다.

평양 거리로 나섰다. 주민들은 "빨리 빨리!", "가요!", "파이팅!"을 외치며 응원했다. 아이들과의 교감이 가장 진심처럼 느껴졌다. 멈춰서 얘기하고 싶었지만, 선수 입장에서 어색할 것 같아 계속 달렸다. 거리를 살펴보았다. 간판에는 '식당'이라고만 쓰여 있고, 무슨 음식인지 쓰여 있지 않았다. 이발소, 슬로건, 벽화. 북한만의 풍경이었다.

어느 순간, 고층 아파트 창문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고, 큰 하트 포즈를 만들어 보냈다. 감동적이었다. 그냥 평범한 아이들. 주변의 분위기만 달랐다면, 남한 거리라고 해도 믿을 뻔했다.

승리의 아치가 보였다. 지쳐 있었지만 경기장 안에 걷는 모습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아 속도를 늦췄다. 게이트 앞 경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함성이 더 커졌다.

나를 향한 응원일까? 아마도 아니었다. 옆에서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우리는 국기나 상징이 담긴 복장을 할 수 없었지만, 일부 중국인과 러시아 선수는 국기를 들고 있었다. 결승선을 통과했다. 믿기지 않았다. 평양 시내를 달리며, 수많은 작고 조용한 교감을 나눴다.

나는 북한 맥주를 사서 관중석에 앉았다. 한 가이드가 다가와 물었다.

"왜 조선말을 해요?"

"아내가 한국인이에요. 남쪽 사람이에요."

잠시 놀란 표정. "한국 이름도 있겠네요?"

"네, 휘월이에요. 달처럼 반짝여서요. 대머리라서요."

다들 웃었다. 우리는 언어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서울에 산다고 해서 어색하진 않았다. 그냥, 조금 슬펐다. 그 순간만큼은, 웃을 수 있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북한 사람들도 스스로 다른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문이나 이야기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