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플랫폼 기반

북한 보건 역량 강화 원조체계 구축을 구상하며...

한반도 평화교류 정책 아이디어 경진대회 1위(통일부장관상) 수상자(보리건빵팀) 칼럼

글. 보리건빵팀 팀장 서선후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평화는 정치적 선언이나 회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있는 작은 틈에서 신뢰와 공감이 자라난다고 믿는다.

국제개발협력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아프리카, 아세안, 중동, 남미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사업을 접했다. 그런데 정작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북한에 대해서는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국제기구와 북한' 수업을 들으며 SDGs 7번 '에너지의 친환경적 생산과 소비', 11번 '지속가능한 도시와 주거지'를 주제로 발표를 준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이번 아이디어 구상으로 이어지는 관심의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마음을 끌었던 분야는 보건 협력이었다. 함께 대회에 참가한 보리건빵 팀은 북한의 보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디지털 플랫폼을 구상했다.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비공식 경로에 의약품을 의존하거나, 환자 본인이 직접 약을 구입해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현실에 놓여 있다. 하지만 단순한 물자 지원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의 경제난과 대북제재는 보건 인프라 자체를 무너뜨려 왔기 때문이다.

2019년 기준 북한의 보건의료 접근성과 품질을 나타내는 HAQ 지수는 50점으로, 남한(86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북한의 모성사망률(임신 도중 또는 출산 과정에서 합병증 등으로 사망하는 여성의 수)은 10만명 당 107명(2020년)으로 남한의 13배, 결핵 치사율은 약 20%로 남한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과거 국제사회가 약품과 백신을 지원했지만, 협력은 대부분 단기적이었고 코로나19 이후로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결국 북한 보건의료의 위기는 단순한 자원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취약성과 외부 협력의 단절이 맞물린 복합적 위기라 할 수 있다.

북한 내 약품 구입방법(%, 복수응답)

우리가 제안한 모델은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협력이다. 열악한 전력 환경을 고려해 오프라인에서도 작동 가능한 보건 플랫폼을 지역 1차 병원에 보급하는 것이다. 이 기기는 외부와의 직접 통신 없이도 작동한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우려하는 정보 유출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주민 건강에 집중할 수 있다. 초소형 PC인 라즈베리 파이, 보건 콘텐츠가 담긴 USB, 설치 매뉴얼로 구성된 키트를 전달하고, 이를 통해 의료진이 주민에게 위생 교육, 응급처치 지침, 영양 관리, 질환 백과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단순한 물자 지원이 아닌, 1차 의료기관의 역량을 높이고 나아가 북한 주민의 기본적 보건 역량을 강화하고자 한 시도였다.

우리가 구상한 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기기를 보급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랫폼을 통해 축적되는 전원 ON/OFF 시간대, 콘텐츠 조회 패턴 등의 간접 데이터를 토대로 어떤 질환이 어느 시기에 유행하고 있는지, 어느 지역의 보건소가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는 북한 내부의 상황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고도 언제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동안의 대북 보건 협력은 대부분 단기적이고 일회성으로 이루어져, 지원이 끊기면 효과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이번 제안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원의 개입 시기와 우선순위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한다. 다시 말해, 단순한 보건 콘텐츠 전달이 아니라 원조체계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체계가 작동한다면 남한과 국제사회는 불필요한 자원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순간에 개입할 수 있고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한계와 우려도 있다. 북한 당국이 외부 기기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고, 주민들에게는 의약품이나 식량이 더 필요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환자 정보를 요구하지 않고, 단순 사용 패턴 같은 간접 데이터만을 수집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체제의 폐쇄성을 존중하면서도 국제사회가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절충안이다. 결과적으로 플랫폼을 통해 주민들의 기초 보건 역량을 높이는 동시에, 남한과 국제사회가 인도적 지원의 개입 시기를 명확히 설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적극적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빈곤과 불평등이 줄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유지되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작은 지원이 쌓이고, 제도가 강화되며, 신뢰가 자라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평화가 만들어진다.

보건 협력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이다. 의약품 지원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며, 북한 지역 내 기초 보건 지식의 확산은 더 건강하고 자립적인 지역사회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쌓인 변화가 결국 더 넓은 의미의 평화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단순한 이상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다. 오늘의 작은 생각과 시도가 내일의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며, 열린 마음으로 배우며 나아가려고 한다. 나의 바람은 이제 개인의 희망을 넘어,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닿아 있다. 언젠가 이 소원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