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민속거리
다시, 함께 써 내려가는 역사
남과 북이 공유해 온 시간, 달리 말하면 바로 ‘역사’다.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즘, 남북 간 역사교류협력의 선두에 서 온 “남북역사학자협의회”를 통해 분단 역사 속 오늘을 헤쳐 나갈 힌트를 얻을 수 있진 않을까. 바로 취재에 나섰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설립과 지금까지 남북이 함께 쌓아온 신뢰의 역사, 그리고 그 대표적 사례인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발굴조사 현장을 경험한 우리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담아 본다.
남북이 뜻을 모아 설립한
‘남북역사학자협의회’
홍순권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운영위원장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개성 민속거리
Q1.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 다음 해인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 방북하실 때 남측 역사학자들도 함께 했습니다. 평양에서 우리는 북측의 역사학자들과 만나 공동학술행사를 개최하자고 의견을 서로 교환했죠. 이 약속을 바탕으로 2003년 3월 평양에서 남북공동학술회의를 열어 우리가 함께 해온 역사에 대해 남북 역사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술적 토론을 했던 그 자리가 참 의미 깊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술회의를 계기로 2003년 8월 남북 양측은 남북공동조직으로 ‘남북역사학자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칭이었는데 실제 명칭으로 정착됐죠.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구성은 여러모로 의의가 있습니다. 남북 간 학술부문에서 처음으로 합의된 공동조직이라는 점이 그 첫 번째입니다. 당시 강만길 전 상지대학교 총장이 남측 준비위원회의 책임을 맡고, 북측은 허종호 북한역사학회 회장이 북측 준비위원장을 맡아 2004년 2월 평양 양각도호텔에서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두 준비위원장은 그대로 초대위원장으로서 역할을 이어 갔습니다.
Q2. 협의회에서 교수님께서 맡으셨고 또 현재 맡고 계신 역할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협의회는 조금 독특하게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전 시대를 망라한 역사학의 여러 전문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당면 과제에 따라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어 그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만월대 공동발굴조사 사업을 위해서는 ‘고려특별위원회’가, 고구려 유적 공동 실태조사 사업에는 ‘고구려특별위원회’가 생겨나는 것이죠. 이 특별위원회가 해당 사업을 맡아 진행합니다.
저의 주 전공은 근대사이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학술연구나 공동토론회 등을 주관하는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어 협의회 사업 전반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Q3. 남북교류협력에도 여러 분야가 있습니다. 그 중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하고 있는 ‘역사’ 분야 교류의 의의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남북 간 분단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원래의 동질감이 점점 약화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장차 민족의 통일을 염두에 둔다면, 남북이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죠. 그런데 이 동질성의 가장 근간에는 남북이 오랜 기간 같은 역사를 공유해왔다는 사실이 존재합니다. 실제 남북 간에 다른 부분은 몰라도 역사 문제만큼은 서로 당장이라도 협력한다는 합의가 남북역사학자협의회로 구체화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경제협력을 비롯한 여타 교류협력 사업은 현실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북 상호 간 서로 이익이 되는 부분이 있어 그만큼 실질적이고 성과도 바로 나타난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교류협력은 조금 다릅니다. 눈앞에 당장 잡히는 이익보다는 같은 공간과 시간을 함께 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유대, 즉 민족정서의 회복이라는 무형의 성과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교류협력 사업들과는 결이 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분단이 땅과 사람만을 가른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분단은 역사의 분단이기도 합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한 기초로서 민족의 근원을 찾는 절실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바로 남북 간 역사교류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4. 그렇다면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주로 진행한 사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협의회 남북측 구성원 모두, 역사학의 교류협력을 통한 민족 동질성 회복과 상호이해 증진, 나아가 평화정착과 통일에의 기여라는 협의회 설립 취지에 동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첫 번째는 남북 공동학술회의 및 학술연구입니다. 공동학술회의 및 연구를 통해 역사적 현안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기본이었죠. 구체적으로 ‘한일합방의 불법성 문제’, ‘일제 강점기 조선인 근로자 강제동원 문제’, ‘국호의 영문표기 문제(Corea와 Korea)’,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 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일종의 기념행사로서의 학술토론회도 있었습니다. 그 의제로는 ‘고구려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남북공동학술토론회(’04.9)’, ‘개성역사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05.11)’, ‘일제강점 100년 남북공동 학술토론회(’10.4)’를 개최하는 등 남북이 함께 논할 수 있는 의제들이 다루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신 남북 공동 문화유산 조사사업입니다. 공동 문화유산조사는 특히 북측 지역에 있는 문화유산 보존사업에 중점을 두고 진행했습니다. 고구려 유적 보존사업을 위한 ‘고구려 고분군 남북 공동 실태조사’나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고구려 고분군 조사는 평양 및 인근 고구려 고분군 소재 지역을 중심으로 실태조사 및 고분벽화 보존을 목적으로 2006년 4월, 2007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됐습니다. 고분 내부의 벽화는 1,3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참 생생했습니다. 우리도 교과서를 통해 익숙한 안악3호분과 같은 무덤에서는 250여 명이나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기도 했죠. 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북측 지역에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는 2007년 5월부터 현재까지, 총 8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우리 협의회의 가장 역점 사업입니다. 이 사업 또한 발굴조사를 계기로 만월대가 위치한 개성의 성균관, 선죽교, 왕릉 등 고려 시대 유적을 함께 묶어서 2013년 ‘개성역사지구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죠.
Q5.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사업'만 알고 있었는데, 그 외에도 많은 사업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소개하실만한 다른 사업도 있을까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 때문에 관련 남북 간 협력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참 많죠. 남측뿐만 아니라 북측 지역의 3.1운동 역사유적 조사 및 보존현황 조사, 또 보존사업 등 시급한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Q6. 3.1운동하면 탑골공원이나, 종로와 같이 남측 지역의 유적지만 주로 생각나는데, 북측에도 3.1운동과 관련한 유적지가 많이 있습니까?
3.1운동은 서울과 평양에서 거의 동시 시작됐습니다. 3.1운동 전반기에는 서북지방, 지금의 평안남북도와 자강도 쪽에서 훨씬 더 활발했죠. 점차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아래로 내려온 것입니다. 3.1운동 유적지는 북측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전 민족적인 운동이었고 남북 지역을 가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북측 지역의 3.1운동 유적지나 관련 역사적 자료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쪽의 유적지를 떠올리기가 쉽습니다만, 이 점은 북측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북측도 3.1운동에 대한 남측 지역 자료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3.1운동 또한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분단으로 인해 3.1운동을 온전히 재구성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더욱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남북이 공동 협력하여 민족의 역사적 사건인 3.1운동 전체를 완벽하게 재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문화유산에 대한 동질성의 확인입니다.
고려 박물관 (옛 고려성균관)
개성 남대문
Q7.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학술·문화 교류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이것은 경제적 분야와 다르죠. 대북제재 상황이기도 하고, 또 우리 내부의 여러 의견도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연구해서 찾아가는 일은 원칙적으로 비정치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해 있었던 만월대 8차 공동발굴조사 시 대북제재로 인해 물자 반출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장비 없이 발굴단원이 직접 도구를 들고 땅을 파며 발굴 작업을 했죠.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남측 조사단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월대의 중심건축군과 이동로인 대형계단을 찾아내는 등 큰 성과를 거뒀고, 특히 계단 뒤에 설치된 암거(배수로)는 남측에서도 사례가 없는 최초의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재 국면으로 인한 난관에 계속 이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습니다.
다른 사회문화교류나 경제협력 사업은 민간 독자 단위라도 북측과 합의가 있으면 진행되곤 합니다. 학술교류사업은 당국 차원의 공감대와 정책적 지원 없이는 제대로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만나본 북측은 남북 간 역사학 교류·협력에 큰 신뢰를 갖고 있었습니다. 공동 조사의 결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실체화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보니 북측에서도 역사 분야만큼은 먼저 공동사업을 재개하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앞으로 정책 입안이나 당국 간 협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 공동의 유산인 역사를 찾아가는 귀중한 일에 함께 뜻을 모아 중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속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역사분야 교류협력이 추진됐으면 합니다.
같이 재구성해온 역사,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문화재청 남북문화재교류사업단 조사연구팀
조은경 학예연구관 박성진 학예연구사 지성진 학예연구사
문화재청 미술문화재연구실
박지영 학예연구사
Q1. 뜻깊은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조사 사업 현장에 직접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각자 담당하셨던 분야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조은경 학예연구관
2018년 10월 있었던 제8차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발굴 사업을 통해 처음으로 본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고고건축, 미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조사단을 꾸려 들어갔었고, 현장에서 50일 정도 머물렀는데 저는 조사 현장의 운영 총괄을 맡았습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
저는 만월대 공동발굴 사업의 시작인 2007년 제1차 조사부터 지난 해 제8차 조사까지 다 참여했습니다. 전문이 고고학 분야라 도구를 가지고 직접 발굴작업을 했죠.
박지영 학예연구사
현재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조은경 연구관님처럼 작년 제8차 조사를 통해 처음 만월대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만월대에서 출토된 유물 중 도자기에 대해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지성진 학예연구사
저도 작년 제8차 조사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재청 건축문화재연구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발굴 조사가 끝난 후 건축 유구에 대한 실측과 정비 현황에 대한 조사 등을 담당했습니다.
Q2.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은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가장 대표적이고, 또 중요한 사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 발굴 사업의 의의를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조은경 학예연구관
아시다시피 고려는 개성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북측에 유의미한 유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입장에서는 실체적 연구가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를 제외하면 신라, 백제 궁궐의 정확한 유구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고려 궁성의 유구가 확실히 잔존하고 있다는 점에 더 큰 의미가 있죠. 2007년 남북역사학자협의회를 통해 만월대 공동 발굴조사가 이뤄져 분단으로 인한 역사의 공백을 메워갈 수 있어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교류협력 측면으로 보자면 만월대 공동 발굴사업은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민족이 가질 수 있는 핵심인 ‘역사’의 흔적을 남북이 공동 작업하며 재확인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지성진 학예연구사
건축문화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는 고려 궁성터 자체가 의의입니다. 그동안 고려시대 건축, 더욱이 궁성에 대한 자료는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현장 발굴조사 자료에 대한 접근이나 현장 실측은 아예 불가능했죠. 그러나 만월대 사업을 통해 비록 터만 남아있다고 해도 초석, 축대와 같이 석조로 된 유적 자체를 실측하고 당시 석재를 치석한 기법을 볼 수 있는, 건축연구 분야에서는 상당히 좋은 기회였습니다.
박지영 학예연구사
도자(陶瓷) 역사로 보면 고려청자의 생산지는 주로 우리 지역인 강진, 부안 등이지만 주요 수요처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비롯한 현재 북측 지역입니다. 특히 고급 청자의 경우는 더 그렇죠. 만월대 발굴은 고려청자의 생산지와 소비지에 대한 연구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학술적 의의가 큽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
개성이 고려의 수도로서 의미도 있겠지만, 한반도의 고도(古都)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서울, 평양, 경주, 개성, 부여를 흔히 고도로 꼽습니다. 각 고도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는데, 비교적 부족한 부분이 바로 개성입니다. 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북측 정권 수립 후 자료들로 간접적으로만 연구할 수 있었는데, 만월대 조사를 통해 역사적 자료를 직접 만지면서 연구자들이 볼 수 있었다는 건 정말 뜻깊은 사례입니다.
북측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북에서는 개성을 ‘전연(前緣)’, 즉 전방지역으로 표현하는데 과거 유교사상이나 상업 중심지로서 개성이 가졌던 무게에 비하면 분단으로 접경지역이 되어 다소 소외되었던 것 같습니다. 만월대 공동 조사사업을 통해 북도 고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돼 북측의 간행물들에도 고려시대에 대한 연구가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또 남북 학자들이 각 분야별로 만나서 서로 어떤 연구자가 있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나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Q3. 만월대의 터만 남은 점이 참 아쉬운데, 당시 고려 황궁의 규모나 위용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지성진 학예연구사
일단 터 자체가 송악산을 주산으로 그 배경을 삼고 있습니다. 송악산의 지세를 내려 받을 수 있도록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월대하면 폭 13.4m, 길이 10.7m의 대형계단 4개가 먼저 떠오르죠. 이 대형계단에 올라서면 정전(正殿)인 회경전 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바로 송악산이 배경으로 보이게 되죠. 회경전과 함께 송악산의 위용이 축대로 올라서는 순간 전신을 덮는 기분입니다. 누구라도 그 순간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까지 조사 결과 만월대를 중심 건축군과 서부 건축군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중심 건축군의 축대가 서부보다 더 높습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어 아쉽지만 건물들이 있을 때를 상상한다면, 중심에서 서부 건축군을 내려다보는 곳이 뷰포인트로서 발아래 펼쳐진 광경이 상당히 장엄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궁궐의 경우 그 축이 질서정연합니다. 이와 달리 고려 궁궐은 자연 지형과 어울려 배치되어 축이 틀어져있기도 하죠. 석축이 곡면으로 위치하는 등 우리에게 익숙한 궁궐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른 느낌의 궁궐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는 관광적 요소도 높다고 평가됩니다.
조은경 학예연구관
만월대의 경우 경복궁처럼 평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탁 트인 느낌은 아닙니다. 또 현재 조사가 진척된 부분까지만 본 것이라 궁성 전체를 연구진이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보다 실제 크기가 작아 보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창덕궁에 크고 작은 오르막이 있는 것처럼 고려 궁성도 정전은 높게 위치하고, 또 건물마다 지형 차이를 주어 구성되는 등 같은 면적이라도 훨씬 다채로운 전경을 자랑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유구의 밀집도가 눈에 띄었는데, 송악산이 배경인 중심건축군은 축을 통해 위계적으로 건물들이 구성되어 있지만 반대쪽인 생활영역은 유구가 굉장히 밀집되어 있어, 실제 건물이 있었을 때 아주 활발하고 다양한 양상을 엿볼 수 있었을 겁니다. 아직 조사를 하지 못한 동쪽에도 동지(東池)나 건물들도 있었으리라 예상합니다.
Q4. 조사단원으로 남북 공동사업의 현장에서 느낀 점이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좋았던 점과 불편했던 점 혹은 아쉬웠던 점을 각각 하나씩 들자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성진 학예연구사
아쉬웠던 점은 집에 못 간다는 것?(웃음) 휴대전화도 노트북도 반출할 수 없어서 외부와 완전 단절된 상태가 좀 답답했죠. 하지만 동시에 좋았던 점이기도 합니다. 현장의 구성원으로 오직 조사만 하면 됐으니까요. 여기서는 연구에만 집중하기엔 다른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연구 목적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반갑기도 했죠.
박지영 학예연구사
저도 비슷한 점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비롯한 가족과 연락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또 노트북 반출이 어렵다보니 어떤 유물을 발견했을 때 더 면밀하게 비교할 자료가 없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현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업들을 환경적 제약으로 그 자리에서 해소할 수 없어서 아무래도 답답했죠.
그래도 오랜만에 현장에서 제 전공에 맞게 유물을 직접 만지며 연구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북측 연구자들과 대화하며 분야에 대한 연구들에 대해 책이나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세밀한 점까지 대화로 채워가는 시간이 연구자로서 저를 고무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
조사 전체를 참여하다 보니, 처음 시작보다 차수를 거듭할수록 작업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물론 국제적 수준으로 보자면 미진한 부분도 있겠지만, 만월대 공동 조사 자체는 분명히 발전했습니다. 조사단의 운영이나 사업에 대한 인식, 태도 등 많은 부분에서 남북이 빠르게 협의하고 조율해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북측 당국 또한 민족유산에 대한 태도가 큰 틀에서 나아지기도 했죠.
다만 아쉬운 점은 사업 자체로 서 있지 않다는, 즉 남북관계와 국제정세 안에 만월대 사업 또한 있다는 데에서 오는 구조적 한계 같은 것입니다. 때론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되는 등 정치·군사적 상황으로 인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점이 아무래도 연구자로서는 안타까운 점이었습니다.
Q5. 개성을 비롯해 북한 지역에 위치한 다른 유적지, 특히 남북 공동협력이 꼭 필요한 곳을 꼽으신다면?
조은경 학예연구관
맘 같아선 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아까 박성진 연구사 말씀대로 개성이 고도(古都)이기 때문에 개성 전체가 역사도시로서 의미가 큽니다. 그래서 개성 지역 전체에 대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사실 남북관계에서 개성은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협력의 요충지로 많이 인식되어 왔습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에서도 그렇죠. 하지만 서해축에는 역사도시로서 개성과 평양이 있고, 금강산과 같은 동해축에도 문화재가 많이 분포돼 있습니다. 역사문화가 보존될 수 있게 조금 더 큰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남북이 지금까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각각 추진해오고 있는데, 더 넓은 관점에서 우리의 조선왕릉(2009년 등재)과 북의 개성역사유적지구(2013년 등재)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듯 남북이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거나, 그를 위한 조사연구를 진행하는 등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
할 일이야 엄청 많습니다. 20년 전부터 남북 간 역사교류협력에 대한 구상이 있었으니까요. 남북 학자 간 인적 교류 자체도 좀 더 활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환경적으로 뒷받침되느냐가 관건일겁니다.
조은경 학예연구관
동감합니다. 지금까지 만월대 공동조사 사업이 주목받은 건 결국 그 희소성에 기인한 측면이 큽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업이 되어 연구 성과 자체로 주목받고 싶은데, 조사 자체로서만 주목받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Q6. 함께 일한 북측 조사단원들과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공통점이 있어 통하는 부분이 많았을 거 같습니다.
조은경 학예연구관
만월대라는 중요한 역사문화재를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고 또 세계에 널리 그 가치를 알리자는 목적 아래에서는 남과 북의 차이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만큼 북 조사단원들이 적극적으로 다양한 고민을 깊게 한다고 봤습니다. 북에서는 ‘참관(參觀)’이라고 표현하는데, 일반인들의 관람을 염두하고 어떻게 이 유구를 잘 보존하여 이해시킬 수 있도록 정비할 것인가 등 진지하게 고민하더군요. 또 실제 발굴 작업에서 드러나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이라던가, 외국의 조사사례나 남측 연구 현황·자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연구자로서 보이는 학술적 흥미 등 열의가 인상 깊었습니다. 더 좋은 조사방법이나 기술에 대해 진솔하게 토론하면서 저 또한 상당히 흥미를 느꼈습니다.
박지영 학예연구사
도자(陶瓷) 분야는 정말 관심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최전성기 때 고려 도자 생산지가 남측에 있다 보니 북 연구자들의 학문적 갈증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자의 시기구분, 용어 차이 등 한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이어서 서로 의사소통을 많이 했습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
우리도 기술이 발전하지만, 10년 사이에 북측도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봤습니다. 현장에서는 정말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임하거든요. 북 연구자들은 진짜 지치지 않는 체력을 자랑합니다. (웃음)
Q7. 문화재청에서 남북문화재교류사업단을 신설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업단 소개를 해주신다면.
조은경 학예연구관
남북문화재교류사업단은 문화재청 차장을 단장으로 문화재활용국장이 팀장인 교류협력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팀장인 조사연구팀 등 총 2개팀으로 구성됐습니다. 저희 조사연구팀은 작년 제8차 만월대 공동 발굴사업에 참여한 인연들이 모이게 됐죠. 4.27남북정상회담 이후 확대되는 교류협력의 필요성과 판문점선언, 9.19남북군사합의 등에 대한 역사 분야의 실천을 위해 조사단이 꾸려졌습니다. 지금까지 참여해 온 만월대 조사를 비롯해 우리 정부 차원에서 북에 제안할 수 있는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등 실제 사업 수행과 정책 제안을 병행하고자 합니다. 또 문화재 협력사업에 일관성, 지속성을 가지고 민간이나 지자체 등 여러 단위와도 협의하며 관련 부처와 북에도 의견을 제시해 가는 등 문화재 교류의 창구로 역할하려는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취재·정리 : 교류총괄지원팀 권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