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19와 세계질서,
그리고 한반도1)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1) 본고는 국립외교원이 2020년 6월 25일에 발간한 『코로나19 이후 국제정세』의 제1장 “코로나19 이후 국제정세와 한국의 전략”을 축약수정 및 업데이트했음을 밝힌다.
코비드-19(COVID-19)는 코로나바이러스의 7번째 변형으로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바이러스였다. 전염병의 확산이 인류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준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전례를 무색하게 할 만큼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서로 반비례 관계인 감염률과 치사율이 최적으로 조합된, 악마적이기까지 한 바이러스가 가져올 미증유의 미래를 현시점에서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미래의 변화에 대해 이번 팬데믹이 ‘돌연변이’인지, 아니면 기존의 추세를 가속하고 증폭하는 촉매일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필자는 촉매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흔들리는 테제(These) :
세계화를 이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위기
세계는 지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 왔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급격히 힘을 잃으면서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풍미했던 ‘세계화(Globalization)’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해서 냉전체제를 지나 탈냉전으로 꽃을 피운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 또는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의 전성기였다. 과거에 명멸했던 약탈적인 제국주의와는 다른, 동의에 의한 패권(hegemony, ‘manufacture of consent’)이라는—미국의 자화자찬이 더해진 과대평가의 측면이 있지만—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민주주의, 자유무역,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세 가지 가치 때문이다.
1) 민주주의의 질적 훼손
그런데 이 질서는 코로나 이전부터 흔들렸다. 동유럽의 민주화부터 아랍의 봄까지 절차적 민주주의의 꾸준한 확산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힘이 약화하고, 극우적 스트롱맨들이 대거 등장하며 실질적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선거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 배타적 민족주의와 선동적 참주정치로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훼손되었다. 선거 때만 투표로 잠시 반짝하는 시민의 역할은 평상시에는 주변화하는 이른바 ‘관객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로 전락했다.
2) 자본주의 모순의 극대화
두 번째로는 자본주의의 모순 극대화이다. 세계는 시장의 확대를 통해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누려왔지만 과실은 전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강요된 희생과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졌다. 세계화에 특화된 기업과 자본은 기회와 이익의 확장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그렇지 못한 중소상인과 노동자는 지속적인 임금삭감과 자산하락으로 고통 받았다.
3) 팍스아메리카나의 퇴색
마지막 세 번째 축인 팍스아메리카나는 미국의 고립주의와 미중 패권갈등의 심화로 국제정치의 안정성이 흔들리며 그 의미가 무색해졌다. 비록 문제점과 한계가 있지만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다자협력의 틀을 통해 미국은 전쟁을 막고 비교적 안정을 유지해왔다. 특히 동맹과 진영대결로 점철되었던 냉전체제가 붕괴한 이후 이런 노력은 열매를 맺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선언하면서 각자도생의 구도로 질주 중이다. 브렉시트는 화려했던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 트럼피즘(Trumpism)은 2008년 재정위기 이후 미국의 위상하락, 중국의 급속한 부상에 대한 우려와 민족주의적 반감이 근본 동기로 깔려있다. 이런 배경에서 각국은 외부로부터의 안보위협을 과장하며 군비경쟁을 강조하고 있다.
뉴노멀(New normal)을 가속화하는 코로나 팬데믹
동북아로 눈을 돌리면 이 상황이 더욱 심각한데, 배타적 민족주의의 발흥과 경쟁적 군비 강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트럼프, 시진핑, 아베, 푸틴, 김정은 등 하나같이 국내 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극우적인 안보 포퓰리즘에 의지하고 있다. 고조되는 미중의 전략경쟁은 점차 냉전질서가 재현되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고조된 미중 갈등이 실제 군사적 충돌에 이르기는 여전히 어렵다. 제3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묵시록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 오히려 불안정한 미중의 기 싸움과 갈등이 파고를 달리하며 장기적 사이클을 만들 것으로 예측된다. 코로나 팬데믹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이런 추세를 폭발적으로 가속화 하는 변수로 소위 ‘뉴노멀’ 현상을 확산시킨다. 이러한 비정상 상태의 장기화는 불안정성, 불평등성, 불가측성과 같은 특징을 촉발시킨다. 파국적 전쟁은 없더라도 뉴노멀의 삶은 작게는 개인의 일상부터, 크게는 국제정치를 통틀어 혼란과 혼재의 세계를 만들어 모두가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세계화가 구축해온 ‘초연결(hyper-connectivity)’ 사회는 바이러스를 ‘물 만난 물고기’로 만들었다. 사람들과 국가들은 이제 살기 위해 단절하고 봉쇄한다. 글로벌 공급의 가치사슬이 위기를 맞으며 지금 세계에는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남은 죽이고 혼자만 살겠다는 사조가 퍼진다. 2016년 옥스퍼드사전은 ‘탈진실(脫眞實, post-truth)’을 그해의 단어로 선정했었다. 객관적 진실보다 감정이나 선동이 지배하고, 페이크(fake)가 팩트(fact)를 압도하는 세상을 가리킨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브렉시트가 결정된 해에 이 단어가 선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미중갈등의 화약고, 동아시아
"모두가 안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라는 말은 진실이다. 따라서 코로나 팬데믹을 포함해서 현존하는 위기상황은 국제협력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당면한 현실은 자국 이기주의가 훨씬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미중갈등 역시 충돌은 곧 공멸이므로 협력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당위는 수용하지만, 그것을 현실에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상호불신이 여전한 가운데 상대의 수용과 양보를 전제로 하는, 협력과 공존을 달성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책임을 두고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하는 미·중의 '블레임 게임(blame game)'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고, 미국의 11월 대선이 다가옴에 따라 ’중국 때리기’가 본격화하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미·중의 전략적 갈등은 영역적으로는 무역, 환율, 기술, 체제 우위를 놓고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지만, 물리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를 중심에 두고 집중되는 경향을 띤다. 지구적 경쟁에서는 아직 중국이 미국과 맞서기에 역부족일 수 있으나, 지정학적으로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북아에서는 팽팽한 세력 대결이 가능하다. 양국의 세력권 경계설정이 관건인데, 한반도, 동중국해, 중국·대만 양안, 그리고 남중국해가 그런 지점들이다. 이들을 연결하면 동아시아를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경계선이 생기는데, 중국은 이를 돌파하려 하고, 미국은 어떻게든 봉쇄하려 하는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5개의 헬게이트 앞에 선 한국의 외교상황
이러한 경계선을 구성하는 4개의 충돌지점 중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한 것은 한반도이다. 냉전 잔재가 남아있고, 북-중-러와 한-미-일의 진영 구도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서 이를 강화함으로써 호된 비용을 치를 것인지, 아니면 경계의 자리에서 완충의 역할을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후자의 길이 국익과 지역의 평화에 바람직하지만, 최근 상황은 반대다. 냉전이 끝난 지 30년이 넘었고 남북한의 국력이 엄청난 격차를 보임에도 통일은커녕 평화공존도 쉽지 않다. 탈냉전 초기의 기회를 바탕으로 분단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이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모색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와 남북관계 악화로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태풍의 눈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현재 당면한 한국외교의 위기를 ‘5개의 헬게이트가 동시에 열렸다’고 표현한다. 북한은 일반적이지 않은 체제를 유지하며 동시에 그 체를 지속하기 위해 핵무기를 놓지 않고 있으며, 한국은 오히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 상황을 활용해왔다. 이념적 진영논리를 유지하기 위해 외교를 국내정치의 도구로 활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선공약과 국정과제에 담긴 바에 따르면 문재인정부가 지향하는 목표는 한반도평화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키는 것 역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대안이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미중갈등의 최전선이자, 안보 포퓰리즘의 전성시대를 맞은 동아시아 정세가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대미편승외교만으로는 한반도나 동북아에서 전혀 ‘이해상관자(stakeholder)’ 역할을 할 수 없고, 미·중의 이익에 종속되거나 반대로 효용성을 상실하여 양쪽 모두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자국가중심주의 시대 속 한반도 생존전략 : 남북관계 개선을 시작으로
따라서 한국이 역내에서 이익을 관철하는 방법은, 근거 없는 북한붕괴론을 내세워 대화를 거부하고 미국에 편승하며 대북제재에 '전부 걸기(All in)'하는 전략보다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미‧중의 패권갈등 체제를 약화함으로써 외교적 주도권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이다. 결실을 이루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하고 중장기적인 노력이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대결구조를 통해 이익을 얻는 안보 포퓰리즘에 대항해 평화 담론을 적극적으로 키우는 일은 국제정치적으로 평화결손의 한반도가 오히려 그 결손을 메움으로써 세계에 희망을 던지게 되는, 우리의 가장 핵심적 전략과제다.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대외정책을 견지함으로써 대결을 조장하는 극우적 민족주의로 가지 않아야 한다. 미국이 구축하려는 한미일 군사협력, 특히 지역 미사일 방어체제에 합류하는 것은 냉전 부활을 가속화 할 뿐이다. 한국은 남북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동북아 단층선의 심화를 막아야 한다.
정치의 본령(本領)은 복지이고, 외교의 본령은 평화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실천해야 한다. 강자가 지배하는 홉스적 야만상태를 수용한다면야 약자를 위해 존재할 정치가 필요 없을 것이고, 생존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과 공포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야 외교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외교는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값싼 방법이며, 평화는 안보가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다. 한국우선의 국익을 추구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을 향해, 세계를 향해, 협력과 평화공존, 민주주의 같은 가치외교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 남북관계의 개선과 교류협력의 증진을 통한 한반도 평화유지는 우리의 살길이자, 세계도 사는 길이다. 시발점은 남북관계 개선이고, 중간기착지는 동북아평화이며, 종착지는 세계평화가 될 것이다.
당 창건 75주년을 맞은 북한, ‘주민생활 안정’에 올인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오는 10월 10일은 북한 노동당 창건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28일부터 나흘간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이번 당 창건기념일을 성대하게 기념하자고 결의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경제건설을 통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을 선대 지도자와 차별화된 업적으로 삼으려 집요하게 경제성과 창출에 매달렸다. 하지만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는 경제건설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고, 제재완화를 견인하기 위한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은 중단된 상태다. 그래서 자력갱생에 의존한 정면돌파전으로 경제건설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연초에 닥친 코로나19, 이례적으로 길고 피해가 큰 역대급 장마와 같은 돌발변수들은 김정은 위원장의 경제건설 목표달성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북한은 현재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모든 국경을 여전히 닫아놓은 상태다. 사실상 셀프 봉쇄조치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9월 8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태풍 '마이삭' 피해로 연말까지 내세웠던 경제계획 목표 달성이 어려워졌다며 이례적으로 전면 재검토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 창건 75주년 대내외적 난관, 김정은의 경제실패 자인 등 이례적 상황
북한은 내년 1월 8차 당대회를 열어 “새로운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7차 당대회(2016년 5월 6~9일)에서 채택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발전 전략’ 기간(2016~2020년)이 올해 말로 끝나 새로운 계획 제시가 필요한 사정을 고려한 당대회 소집이다. 당 8차 대회는 7차 당대회 이후 4년 8개월 만이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11월 3일)가 마무리되고 새 정부가 출범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김정은 위원장은 8월 19일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열린 당 중앙위 7기 6차 전원회의에서 “당과 정부 앞에 나선 새로운 투쟁 단계의 전략적 과업을 토의·결정하기 위해 조선노동당 8차 대회를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고 「노동신문」이 전했다. 당대회 소집 결정서에는 “계획됐던 국가 경제의 장성(성장·발전) 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하는 결과도 빚어졌다”고 명시했다. 결정서는 “혹독한 대내외 정세 지속”과 “예상치 않았던 도전들”을 그 이유로 꼽았다. 고강도 대북 제재, 코로나19와 ‘큰물(홍수)피해’라는 ‘3중 재난’이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는 자평이다.
북한은 지난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올해는 5개년 전략목표를 마감하는 해이자 노동당 창건 75주년(10월 10일)을 맞는 해이기도 해 구체적 성과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대북제재와 코로나19, 연이은 태풍과 수해 여파 등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이날 채택한 전원회의 결정서 초안에서 "혹독한 대내외정세가 지속되고 예상치 않았던 도전들이 겹쳐드는데 맞게 경제사업을 개선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태풍 9호로 인해 함경남도 검덕지구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한 것과 관련해 노동당 중앙군사위는 9월 8일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적인 피해복구대책을 논의하면서 "예상치 않게 들이닥친 태풍 피해로 부득이 우리는 국가적으로 추진시키던 연말 투쟁과업들을 전면적으로 고려하고 투쟁방향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정치국 회의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올해 경제계획 수정을 밝힌데 이어 5개월 만에 또 다시 이마저도 변경할 뜻을 언급한 것이다. 지난번 정치국회의에서는 '일부 정책적 과업들을 조정·변경'을 논의했지만 이번에는 '전면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만큼 북한 경제가 어렵고,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어려워졌다는 의미로 봐야할 듯하다.
북한 경제동력 여부 등 내부 상황
북한은 지난해 말 노동당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대북제재와의 '정면돌파전'을 올해 국정운영 기조로 정하고 자력갱생으로 경제성과를 창출해 오는 10월10일 당 창건 75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지난 1월 코로나19가 급속 확산함에 따라 국경봉쇄 등 방역 정책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각종 물품 수입이 제한돼 당초 경제 구상은 차질을 빚게 됐고 주민 생활도 직격탄을 맞았다. 북한은 애초 우선순위로 정했던 주요 건설사업을 뒤로 미루며 지난 3월 평양종합병원 착공에 나서기도 했다. 현대적 병원 설립으로 보건 시스템을 개선하고 당 창건 기념 성과물로 삼겠다는 복안이었지만 이마저도 완공 기일을 맞추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2007년 이후 최악의 홍수가 발생해 북한 최대 곡창지대인 황해북도를 중심으로 농경지 3만9296정보가 침수됐고 주택 1만6680여세대와 공공건물 630여동, 도로와 다리 등이 파괴되는 악재도 겹쳤다. 이처럼 자연재해는 농업분야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경제건설에 집중시켰던 경제적 역량을 피해복구지역으로 분산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최근 북한은 올가을 이후 백만 톤 가까운 곡물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많은 북한 주민이 가뭄과 홍수, 열대성 저기압 등 이상기후로 인한 굶주림을 겪을 위험이 커졌다는 주장이다.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남북협력 가능할까
북한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북한이 이전과 다른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측면도 함께 봐야 한다. 북한은 1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여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대응을 하면서 경제정책들을 수행하는 데 차질을 빚고 있긴 하나 위기대응역량은 이전보다 강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취약한 보건의료, 물리적 인프라와 함께 전염병, 재난·재해에 대응하는 능력이 낮아 전염병과 자연재해 발생 시마다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아왔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전염병과 재난·재해에 선제적이고 공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위기관리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적어도 피해 규모의 최소화를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고 체제결속을 강화하는 리더십도 엿보인다. 김 위원장은 재해복구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당 창건 75돌을 기념하는 성과로 대체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보이고 있다. 결국 3중고로 침체된 북한 사회를 반전시키는 리더십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인민생활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민들의 지지기반 확보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김 위원장이 외부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재해복구를 마무리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어떠한 외부적 지원도 허용하지 말라”며 피해 복구 과정에서 남북협력을 포함한 국제협력을 배제하고 내부자원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 재해복구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북한은 2016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 사이에 함북도 지역을 휩쓴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을 때 피해상황을 공개하면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공식‧비공식 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외부지원을 일체 거부하고 있다. 어렵지만 자력갱생 방식으로 최소한의 주민생활 안정을 도모하면서 지금의 위기를 정면돌파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분간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남북협력의 여지는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정은 위원장도 자신이 서명한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의 합의 이행에는 지속적인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전의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맞아 SNS에 올린 메시지를 통해 밝혔듯이 “역사에서 그저 지나가는 일은 없다. 역사에서 한번 뿌려진 씨앗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열매를 맺는 법이다.”
역사에서 그저 지나가는 일은 없다.
역사에서 한번 뿌려진 씨앗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열매를 맺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