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결과와
한반도 문제 전망


박인휘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 공화 양당 후보 모두는 역사상 최고의 득표수를 기록했다. 트럼프 후보는 국민적 지지와 민심을 보살피지 않았기에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고, 정책과 비전으로 표심에 어필하기 보다는 지난 4년간 반복했던 순열 지지층의 결집만을 무기로 삼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억지 주장으로 시시비비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최소 5백 만 표(7%) 이상의 표차로 승리한 바이든 당선자가 2021년 1월 20일 제 46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데 별 이변은 없을 것이다.

538, 미국 선거인단
숫자의 의미

미국의 모든 주(州)는 인구의 많고 적음을 떠나 똑같이 2명씩의 상원의원을 가진다. 독자적인 개별 주들이 합쳐진 ‘연방정부’라는 건국의 가치를 100명의 상원의원 숫자에 담은 것이다. 하원의원의 경우 정확히 인구규모에 따라 분포되어 있어서, 캘리포니아 53명, 알라스카 1명, 이런 방식으로 435명을 만들었다. 수도 워싱턴 D.C.에도 주민이 있으니 상하원 의원은 없지만 3명을 할당, 이렇게 합쳐진 숫자가 538명이라는 선거인단 숫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 불합리해 보이지만, 538이라는 숫자에는 미국의 ‘정신’과 국민들의 정확한 ‘등가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미국 대선 전망의 두 가지 기준 

언론의 보도처럼 이번에도 전문가들과 여론기관의 예측이 빗나간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 전문가들이 미국 대선을 전망하는 핵심 기준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비선거가 한창인 2월 말의 여론을 중시하는 예측치이고, 또 하나는 선거를 4개월 정도 앞두고 후보자를 선출하는 전당대회 시점을 중시하는 예측치이다. 전자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예비선거의 특성상 확실한 지지층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된 기준이라는 것이고, 후자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소위 ‘대세(大勢)’라는 것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이번 선거의 핵심 변수는 ‘코로나 19’와 ‘5월과 10월의 흑인 사망 사건(BLM : Black Lives Matter)’이었는데, 이 두 변수가 예비선거 기간 이후에 발생한 까닭에 예비선거 지지층을 핵심 독립변수로 삼은 여론기관은 정확한 예측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전히 유효한 트럼피즘(Trumpism) 

이제 선거는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승복하는 데 여러 잡음이 있었으나, 대체로 본인의 퇴임 이후 정치적 세력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재 트럼프는 두 가지 옵션을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는 제도적 수단을 휘두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더기 소송전(訴訟戰)을 치르는 것이다. 먼저 후자의 경우 일부 판결에서 보듯이 문제가 되는 몇몇 주에서 트럼프의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 사안에 대해서 연방대법원이 관여할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매우 낮다. 전자의 경우가 다소 우려스럽기는 한데, 갑작스런 인선을 통해 국방장관과 같은 주요 포스트가 트럼프 대통령의 충복들로 채워지고 있다. 극단적인 시나리오로서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에서 군사적 옵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일부 언론 보다가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우(杞憂)에 그치는 분위기이다.

어쩌면 미국이 직면한 정말 어려운 과제는 바이든 행정부 등장 이후가 될 것이다. 한 마디로 ‘트럼피즘(Trumpism)과 바이든 정부의 공존’인데, 이러한 예측의 근거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48% 수준에서 비교적 고른 득표를 거뒀다는 점에 있다. 정치적으로 저평가된 평범한 백인 노동자층, 중국의 부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국민적 실망감, 불필요한 글로벌 이슈에 미국의 비용만 들어간다는 불만, 세계경찰 역할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의 회의감, 이런 감정들로 무장한 트럼피즘은 수그러들지 않았음이 이 번 선거에서도 증명되었다. 향후 바이든 정부의 정책들이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법인세 인상, 의료보험 개혁, 최저임금 향상, 국제협력 주도 등의 사안들이 미국인의 보통 정서와 충돌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전망 :
클린턴일까, 오바마일까?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미국 국민들의 정서는 바이든이 주도하는 다양한 외교정책에도 고스란히 투영될 전망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신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매우 정교한 예측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다수 언론들은 대체로 두 가지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하나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클린턴 행정부 3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오바마 행정부 3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전자의 경우 드물게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민주당 정권이 동시에 들어섰으니, 북한을 상대로 한 긍정적인 관여정책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이제 북한은 과거의 북한이 아니고 핵무력을 완성한 북한이기에 바이든 행정부 역시 엄격한 비핵화 정책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오마바 시기처럼 적극적인 북미 대화 자체가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바이든 당선자의 머릿속에는 북한에 대한 두 개의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있던 바이든은 평양 방문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북한의 비핵화 및 북미 관계 정상화가 교환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비록 방북이 불발되기는 했지만, 바이든 당선자는 만약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앨 고어 후보가 승리를 거두고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었다면, 북미관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북한에 대한 배신과 분노의 감정 역시 공존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 부통령으로서는 드물게 외교를 책임지는 부통령 역할을 담당했던 바이든은 2012년 당시 북미 간 어렵게 성사된 ‘2.29 합의’가 북한의 반칙으로 파기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핵능력이 더욱 고도화되었으니, 북한을 상대로 비핵화 협상을 벌이는 일이 더욱 힘들 것이라는 불신의 벽을 더욱 높게 쌓고 있을 수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성과를 위한 두 가지 기회

이러한 배경에서 향후 우리 정부가 취해야 할 대미 전략은 무엇일까?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후반부를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대체로 두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고자 한다.

1) 한반도 중재자론의 실현 가능성 대두

첫째,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의외의 기회를 포착할 가능성이 있는데, 과거 트럼프 행정부의 경우 북미협상의 구도가 트럼프 대통령 본인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반면,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한반도 문제 해결이 미국 대통령을 중심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북한 비핵화 문제에 관심이 높으면서도, 동시에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을 수용하는 포용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던 우리 정부의 ‘중재자론’이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작동의 순간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나리오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북한의 돌발 행동 자제’, ‘한국 내 북한정책에 대한 여론 분열 최소화’, ‘어떤 형태로든 북한이 비핵화에 동의한다는 시그널’, ‘남북대화 및 관계개선이 미중갈등을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논리’, ‘남북관계 개선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아시아) 전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비전 제시’ 등이 그 내용이다. 하나 같이 매우 어려운 전략적 과제여서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혜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2) 다양한 스몰딜의 가능성

둘째, 바이든 행정부가 추구할 전통적인 민주당 방식의 ‘협상외교’가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미국 내 최고의 외교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바이든 당선자는 소위 ‘과정 중심적인 접근’을 신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전임자인 트럼프 대통령처럼 ‘톱다운’ 방식의 정상회담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비핵화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제안 내용을 매우 꼼꼼하게 들여다 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과정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알려진 바로는, 북핵 문제를 관할하는 책임 부서가 트럼프 행정부처럼 백악관이 아니라 국무부 내의 ‘비확산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북미정상회담과 같이 일거에 서로의 최종 목표치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담판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반면에 오히려 다양한 ‘스몰딜’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일련의 스몰딜이 쌓여가다 보면 결국 북미 간 ‘비핵화-관계정상화’라는 큰 그림의 퍼즐을 맞출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조심스럽게 가져보게 된다.

기회를 현실로 만들려면 : 바이든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을 정확히 분석해야

그런데 이러한 기대감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바이든 행정부의 대한반도 및 대북정책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분석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이 평소 선호하는 빅딜 방식의 협상전략을 한반도 평화를 위해 활용하려한 의도는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었지만, “싱가포르에 사진 찍으러 간다”는 트럼프의 표현처럼 미국 행정부 및 백악관이 정확하게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가에 대한 분석에는 실패한 측면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는 이러한 실수가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국 국민들의 정서 속에 자리 잡은 트럼피즘은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될 전망인데, 관련하여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 중에서 계승될 부분과 차별화될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에도 우리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어쨌든 한미동맹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자산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새롭게 들어설 미국 행정부에게 접근하는 출발선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더욱이 코로나19 이후 미국이 과거와는 다른 국제협력 모델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글로벌 이슈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일 역시 한반도 문제에 커다란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여러 모로 한미 간에 2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양국의 민주당 정부는 중요한 ‘외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한반도가 평화의 순간을 맞이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대북인도협력 사업의 평가와 과제 :
“이제 다시 시작할 때다.”


이기범 
(사)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이사장

2020년이 저물어가면서 남북의 협력도 함께 저물어가고 있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이 남과의 접촉을 전면 금지했지만 올해 초에는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모든 통로가 봉쇄되면서 상황이 곤란해졌다. 상반기에는 외국기업이나 해외동포단체들과 3자 협약을 통한 방식으로 물자가 북으로 전달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편법’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한가라는 내부의 문제제기가 치열했다. 그러나 하반기에 들어서는 이런 방식 역시 북 당국이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신의주세관을 폐쇄함으로써 중단된 상태라고 전해지고 있다. 서해에서 공무원이 피격된 사건이 발발하며 북에 관한 민심마저 냉담해진 느낌이다. 이제 관성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북이 경제난 때문에 결국은 손을 내밀 것이라는 낙천주의, 어떤 방법이든 통하면 된다는 편의주의, 제공하는 물자의 규모를 늘리면 북이 화답할 것이라는 물량주의 등을 접어야 한다. 지금은 협력의 기반이 붕괴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면서 협력의 기반을 다시 조성해야 할 때이다.

1. 북은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북은 지금 ‘80일 전투’를 치르고 있다. 이 전투는 내년 1월 제8차 당 대회 직전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북은 장기·고강도 제재, 코로나19 대처 및 국경 폐쇄, 홍수 및 태풍 피해의 ‘3중 재난’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월 5일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에서 “전당적, 전국가적으로 80일 전투를 전개”하여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목표를 달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런 속도전 방식의 전투는 자원 배분의 왜곡과 경제 기반의 훼손 등을 초래하는 부작용이 크다고 한다.1) 그래서인지 그동안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전투를 벌이지 않다가 집권 9년째가 되는 이번 해에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1) 권혁철.
지금 평양은 ‘80일 전투’ 중. 한겨레신문. 2020.10.14.

2) 리팅팅.
북한 경제: 삼중고 속 자력갱생. 한겨레신문. 2020. 10. 25.

3) 장형수, 김석진.
북한의 외화수급 및 외화보유 추정과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시사점. 현대북한연구. 22(1): 8-43. 2019.

북이 경제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남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는 기대는 ‘자기성취적’ 기대로 보인다. 최근만 보더라도 2019년 북의 가뭄과 식량위기, 아프리카돼지열병 대량 발생, 코로나19 확산 등의 국면에서 북의 지원 요청을 예측하였으나 북은 남의 지원을 거부했다. 최근 들어 북의 경제적 타격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에 도달한 것은 아니므로 자력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시장 물가와 환율 시세의 유지, 식자재 수입 증대를 통한 식량 공급, 생산능력과 유통구조 개선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2) 게다가 2019년 현재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25억 원~58억 원에 상당하는 외화도 아직 고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3) 최근 북이 유엔에 재정분담금 약 2억 원을 납부했다는 소식이 그런 과시일지도 모른다. 물론 권력층은 불편을 겪고 인민들은 내핍 생활을 하겠지만 어쨌든 견뎌낼 것이다. 북의 체제와 인민들의 ‘회복탄력성(resiliency)’은 상상을 뛰어 넘는다.

더욱이 북은 ‘대미 핵협상-제재 해제-경제 발전과 체제 보장’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므로 경제난을 감내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할 것 같다. 내년 당 대회에서 ‘3중 재난’을 성공적으로 돌파했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경제발전5개년 계획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계획의 방향은 ‘자력자강’과 ‘자력갱생’ 노선을 강화하는 방향일 것이다. 북은 당과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심단결하여 이런 ‘결사항전’을 여러 번 치러왔다. 스스로를 “정치사상강국,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이라고 믿는 북이 ‘혁명투쟁’을 펼치면서 남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남과 교류하는 일은 이런 과업에 균열과 혼란만을 초래한다고 볼 것이므로, 이런 국면에서 남의 협력 제안에 북이 화답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예상된다.

2. 정부가 협력의 기본 조건과 신뢰 형성을 주도해야 한다.

올해부터 북은 우리 당국과 대화가 열려야 민간과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팬데믹 이전에 당국을 배제하던 것과 달라진 입장이다. 동시에 우리 당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므로 협력할 뜻이 없다는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한다. 정리하자면, 우리 정부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떤 협력의 여지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북의 입장을 외면한 채 사업 제안을 더 크게, 더 많이 하자는 흐름이 여전한 것 같아 걱정이다. 지금은 대규모 제안이나 기발한 제안에 의해 돌파가 가능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민간이 해야 할 역할이 있지만,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조건과 신뢰 기반 조성은 정부의 역할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와 대화를 통해 북미협상의 여건을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정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북에 협력의 진정성을 전달해야 한다.

첫째,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하는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를 분명하게 공식화해야 한다.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지만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불허하는 조치가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불신의 장막이 존재하지만 그 장막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변명을 이해하며 협력할 상대는 없을 것이다.

둘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법제화를 서둘러야 한다. 요즈음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의 개정과 ‘남북인도협력법’ 제정이 민간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그런 법은 절차법이고 그 근거가 되는 모법(母法)은 아직 부재하다. 두 선언의 취지를 담아 자유왕래와 포괄적 협력을 원칙으로 하는 법이 제정되어야 하고, 국회의 선언 비준이라도 선행되어야 한다.

셋째, 육로, 해로, 항로를 통한 통행을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개성은 남과 북의 통로일 뿐 아니라 제3국과 왕래할 수 있는 통로로 북에 유용할 수 있다. 지난해와 올해에 개성을 통해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북측 의사를 타진하면 미국에 ‘결재’ 받았느냐고 묻곤 했다. 2018년 말에 북에 약속한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를 전달하지 못한 사례와 최근 경기도가 도라산 전망대에 집무실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불발되는 사태 등을 보면 북의 그런 요구가 반드시 무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전례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

넷째, 판문점 선언에 명시된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라는 원칙을 이행하기 위해 군비확대를 자제해야 한다. 북도 그 원칙을 어겼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도발은 없었다고 인정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로 우리 측의 군비 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조치를 비롯하여 내실 있는 대북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범정부 협의체가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대응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관련 부처들 간의 협의와 조율이 긴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일관되고 치밀한 정책이 선제적으로 실행되기를 기대한다.

3. 민간은 새로운 협력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많은 민간단체들이 각각 혹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북에 꾸준하게 사업을 제안하고 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제안서를 전달하고 북이 접수하기도 했다. 성과가 미약하여 실망이 크지만 올해 말과 내년 초가 결정적 시기이므로 본연의 역할에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이다.

첫째, 북의 ‘준 공식(a quasi-official)’ 통로를 활용하여 북 당국에 협력의 의지와 계획을 전달함으로써 북이 협력을 구상하는 데 ‘어처구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처구니는 맷돌의 위쪽 돌과 아래쪽 돌을 연결시켜 주는 장치로서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이 작동하지 못한다. 남과 북의 당국이 각각 맷돌이라면 민간은 두 맷돌을 이어주는 어처구니 구실을 해야 한다. 함께 사업을 추진한 경험이 있어서 신뢰할만한 북의 관계자들이 제3국에 주재하고 있으므로 그런 통로를 활용하여 협력의 여건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둘째, 북과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물론 시급한 인도적 필요에는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일방적 물자 지원은 북이 거부할뿐더러 협력의 취지에도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대등한 위상’으로 협력하여 양측이 이익과 혜택을 창출하고 공유하며 자립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방식은 북에게도 익숙한 유엔의 지속가능개발(SDGs) 목표에서 장려하고 있는 방향이므로 비교적 쉽게 협의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 모델, 사회연대경제, 북의 사회협동단체와 남의 사회적 기업의 협약, 글로벌커먼스에 동반 진출 등 사회단체와 공유경제를 결합하는 방식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초보적 방식으로 북의 지역 특산품을 수입하고 그 대가로 해당 지역개발에 남의 민간이 참여하는 방안이 가능하겠다. 또한 남북의 천연소재를 활용한 식품, 의약품, 화장품을 공동으로 개발하여 판매하는 물류센터 설치와 국제시장 동반 진출, 북에 스마트 팜과 산림 조성, 바다목장 설치에 필요한 과학기술과 설비를 제공하고 이익을 공유하는 방안, 풍력발전과 재생에너지 공동생산 등을 모색할 수 있다. 이미 이런 공유경제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결실을 맺고 있으므로 남북 양측의 실정과 요구에 적합한 계획을 공동으로 수립하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셋째, 새로운 협력모델의 파트너를 지방자치단체와 기업 등으로 확대하고, 그러한 모델의 실행을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 협력사업의 재원으로 협력기금은 여전히 유효하겠으나 이익이 창출되면 그 이익을 사업에 재투자하는 등의 변화가 가능하도록 법규가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민간의 사업은 지역이나 특정 기관에서 펼쳐질 전망이므로 지자체와 기업 등 파트너십을 확대하기 위한 기반도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마무리

남북 사이의 일이 통쾌하게 지속된 기간은 별로 없다. 민간이 하는 일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과거의 단절과 다른 점은 우리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이룩하려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이고, 북도 합리적 제안을 수용할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간단체에는 경험이 풍부한 중견 활동가들이 아직 일하고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새내기 활동가들이 발상의 전환을 추동하고 있다. 답답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 없다. 차근차근 치밀하고 단단하게 준비하며 나아가야 한다.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의 시구를 되새긴다. 한반도의 근본적 변혁을 원하는 우리가 이제 다시 시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