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할 때


박명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2021년 특별 시리즈, 명사초대석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 갑니다. 남북관계 주요 분야 명사들은 올해 남북관계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남북 교류협력은 다시 열릴까요? 두 번째 명사는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초대 소장을 역임하신 박명규 교수님이십니다.

북한의 향후 5년간의 전략 기조를 정하는 노동당 8차 당대회가 8일간의 긴 일정으로 12일 폐막했다. 전해진 보도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전략적 대응 기조가 전반적으로 우리가 기대했던 흐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했지만, 트럼프 시기의 정책적 혼선이 남긴 후유증과 북한의 핵무력 강화노선을 고려할 때 북미관계의 전망도 밝지 않다.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나 팬데믹의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미중 대립과 한일 갈등도 약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앞날을 전망하는 우리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워짐을 느끼는 것이 필자만은 아닐 것 같다.

2021년의 기대와 전망

이번 당대회에서 “남북관계 현 실태는 판문점 선언 발표 이전 시기로 되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한 김 위원장은 “정세를 격화시키는 군사적 적대행위와 반공화국 모략소동이 계속되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북남관계개선의 전망은 불투명하다”라면서 한미연합훈련을 관계 개선의 장애물로 규정했다. 김 위원장은 “남조선에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선의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화답하는 만큼, 북남합의들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만큼 상대해줘야 한다”라면서 “남조선 태도 여하에 따라” “다시 3년 전 봄날”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했지만, 방역 협력과 금강산 관광 등 우리 측의 제안에 대해선 “비본질적 문제”라면서 사실상 거부했다. 이번 달 출범을 앞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 대해서도 북한은 강경한 태도를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고 했고 “새로운 조미(북미)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는 데 있다”라는 오래된 주장을 반복했다. 미국을 “우리 혁명 발전의 기본 장애물이자 최대 주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전면적인 대화나 타협을 모색할 의지는 크지 않음을 내비쳤다.

한국 정부는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정착, 남북관계 발전을 추구해 나간다는 정부의 입장은 일관”되며 “남북 합의를 이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라는 원론적인 뜻을 표명하는 데 그쳤다. 사실 한국 정부의 운신 폭은 크지 않다. 신뢰 구축과 대화 모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한국의 입장에서 방역협력이나 개별관광 등은 향후 남북관계 개선을 가늠해볼 시금석이자 동력형성의 마중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교류협력의 의미를 부차화시키고 다시 정치군사적 대립구도를 전면화했다. 아마도 오는 3월 한미연합훈련 실시 여부를 남측의 대북관계 개선 의지의 시험대로 활용하면서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평화는 두 개의 축으로 달성 가능한 미래다.

정치·군사적 신뢰 구축이 그 한 축이라면 남북한의 다양한 교류협력이 또 하나의 축이다.

교류협력은 평화 구축의 핵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까? 쉽게 대답을 찾기 어렵고 구체적 계획과 전망을 세우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이 원래 그런 것일지 모른다. 때로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악화하지만, 때론 뜻하지도 않은 행운과 급격한 전환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그 전개를 짐작이라도 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냉정한 눈으로 시세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우리의 바람과 다른 탁류가 흐를 때일수록 긴 호흡으로 평정심을 갖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교류협력의 중요성과 그 시대적 함의를 분명하게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교류협력을 비본질적인 문제라 치부한 북한의 생각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두 개의 축으로 달성 가능한 미래다. 정치·군사적 신뢰 구축이 그 한 축이라면 남북한의 다양한 교류협력이 또 하나의 축이다. 그 둘의 선후관계나 속도는 여건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지만, 결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다양한 교류협력의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사이의 만남과 신뢰야말로 한국 사회를 통합하고 남북한을 화해시키며 동북아에 평화를 이룩하는 관건임을 재확인할 일이다.

둘째로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준비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북한은 국제적인 경제제재와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봉쇄, 그리고 수해와 인프라 낙후성 등 소위 삼중고를 겪고 있다. 최고지도자의 입으로 경제계획이 현저하게 달성되지 못했음을 자인해야 할 정도로 주민의 삶과 경제의 어려움은 크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력갱생의 길을 선택했지만 자본, 방역, 기술, 인프라 등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절실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주체는 한국이다. 어둠이 짙어지면 새벽이 가까움을 알 듯 어쩌면 현재의 답답한 상황이 새로운 전환의 때가 머지않아 도래할 것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기적인 정책효과를 노린 조급한 대응책보다 묵묵히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셋째로 교류협력은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민간주체의 자발성과 역동성이 핵심임을 확인하고 그 잠재력을 키워가는 노력이 모색되어야 한다. 2018년 이래 남북관계를 되돌아보면 탑다운 전략을 내세워 북미, 남북, 한미 정상들의 협상만 두드러졌고 민간부문의 활동은 지원이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꾸준히 전개되어온 남북간 민간부문의 교류나 협력이 현저히 약화하였다. 대북 지원과 협력, 남북간 교류를 위해 시간과 기술, 자원과 역량을 투입하려는 사업자, 활동가, 지식인, 시민들의 역량이 다시 커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 때를 준비해야

“냉안간시무 허심독고서(冷眼看時務 虛心讀古書).” 19세기 조선 말 격동기를 살았던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 박규수의 말이다. 냉정한 눈으로 시대의 쟁점들을 꿰뚫어 보고 고요한 마음으로 옛 책을 읽는다는 뜻인데 거대한 시대적 전환기에 어떤 대응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데 참조할만하다. 2021년 우리에게도 냉정한 눈과 고요한 마음이 절실해 보인다.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되 평정심을 잃지 않고 뜻있는 시민과 기업, 민간부문에서의 역동성을 강화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불원간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올지 모르는 ‘그 때’에 신뢰와 화해와 평화 구축의 핵심 역량이 될 민간의 다양한 자산들을 키워나가는데 노력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