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총사령부총무처 직원. 두 번째 줄 맨 오른쪽이 지복영(1940. 12. 26)

대한의 잔다르크. 그를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부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군인 ‘여자 광복군‘의 일원이었다.

여자 광복군이 되어 활동하던 지복영 대원의 모습

최전선으로 자원한 그를 늘 소리 없이 걱정하는 모친을 위해 사진관에서 찍었던 이 독사진은 선생의 광복군 시절 유일한 독사진으로 남았다.

지복영(池復榮).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 부친과 태어난 지 3일만에 헤어진 그의 이름 두 글자 ‘복영’에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속히 만날 수 있길 바란 모친의 소망이 담겼다. 그리고 그 이름은 평생 독립된 조국을 되찾기 위한 길을 걸어갈 그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조국 독립하는 데 남자 여자 가리겠느냐.”

아버지 지청천 장군에게 광복군에 입대하겠노라 묻자 지 장군이 흔쾌히 허락하며 한 말이다. 스무살 청년 지복영에게 조국 광복에 헌신하는 일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루는 길이었다. 그렇게 광복군 입대한 지복영은 이후 최전선인 광복군 제3지대에 지원했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은 이를 몰랐다. 주위 사람들이 여성이 적후방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며 말렸다. 

“총사령관이 아시면 큰일 납니다.”

지복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밤새 편지를 써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본 지청천 장군은 답했다.

“내가 남의 자식도 보내는데 내 자식이라고 금지해서 못 보내겠느냐. 좋다. 잘 생각했다.”

지복영은 항일무장투쟁 전선의 한 가운데서 종횡무진했다. 결핵에 걸려 후방으로 배치되기까지 지 소령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푸양(阜阳)에서 낮에는 총을 들고, 밤에는 광복군 초모(招募) 및 선전 사업에 힘쓰며 남자 광복군 대원들과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에는 진급해 지복영 소령이 됐다.

“여자가 활동하면 그저 그렇지……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되겠단 생각에 아주 결심을 단단히 했거든요.”

성별을 떠나 조국독립이라는 민족의 대의 앞에 우뚝 서 광복을 쟁취해 낸 지복영 선생의 삶. 그의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2007년 향년 87세로 눈을 감은 선생은 대전국립현충원에서 영면하고 있다.

서안으로 이동중인 지복영, 조순옥, 오광심 선생. 그들은 이곳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선전 활동에 주력했다.

훈장을 가슴에 단 지복영 선생의 모습

대전국립현충원에 있는 지복영 선생의 묘

지복영 선생의 생전 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의 증인-여성 광복군, 
독립운동가 故 지복영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