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프리(Gender-free)
: 남북교류협력과 여성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1908년 미국 뉴욕에서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나선 시위를 기념해 제정된 날로, 매년 3월 8일이면 전 세계적으로 성평등, 참정권, 평화 등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날이기도 하다. UN에서는 1977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했고, 우리나라는 좌익운동의 하나로 치부되어 억압받다가 2018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북한 또한 3월 8일을 ‘국제부녀절’로 칭하며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명절로 지켜왔다.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남북교류협력의 각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셨다. 남북관계 문제를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일지, 여성으로서 보고 경험한 남북관계는 어떤 것인지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남북교류협력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와 주요 경력

웹진 ‘이음’에서 이번에 좀 색다른 기획을 준비해봤다.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해 남북관계, 통일분야에 종사하고 계신 여성 전문가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자 해서 오늘 이렇게 네 분을 모셨다. 개인적으로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뜻깊고 또 귀중한 기회다.

일단 첫 질문으로는 어떻게, 또는 왜 남북관계라는 분야에 종사하게 되셨는지 묻고 싶다. 또 각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시기까지 어떤 경력들을 쌓아 오셨는지도 궁금하다.

질문을 받으니 왠지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웃음) 대학 때 통일운동이 한창이라 그때 남북관계에 관심갖게 됐다. 여학생회 활동을 했었는데 97년 당시 심각한 북한 식량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돕기 위해 학교에서 1일 단식하며 북한 식량지원을 위해 기부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북한에는 왜 식량난이 생겼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고 북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여성학과 북한학을 연계한 연구를 하면서 ‘북한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제 분야가 됐다.

맨 처음에는 현재 한국여성평화연구원의 전신인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에서 실무자로서 평화운동 분야에 발을 들였다. 1991년 분단 이후 첫 남북여성 교류가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토론회를 통해 성사됐는데, 일본 도쿄에서 열린 5월 1차 토론회 이후 서울로 북한 여성들을 초청하는 11월 2차 토론회 진행위원회가 근무하던 연구원에서 맡게 되며 본격적으로 남북여성교류에 뛰어들게 됐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당시 북한 여성대표단장이었던 여연구(려연구) 선생이 40여 년 만에 서울 우이동에 있는 아버지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 참배한 뒤 눈물을 흘린 모습이 역력한 얼굴로 숙소로 돌아오셨던 모습을 마주한 것이었다. 저로선 처음으로 북한 사람을 직접 본 셈이었는데 선생의 얼굴에 깃든 깊은 슬픔과 상처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의 문제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한반도를 터전으로 삼은 남북 여성의 삶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갈지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지금까지 온 셈이다. 저는 전문가라고 불리기엔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웃음)

저는 표현하자면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그러다보니 오랜시간 북한을 교류의 대상, 파트너로 생각하진 못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다 일을 하고 싶은 열망이 컸던 차에 지우다우(지금우리가다음우리)라는 사단법인에 입사하게 됐다. 지금은 작고하신 유동호 대표님을 처음 뵙게 된 곳도 면접장에서였다. 통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저로선 수만 명의 청년학생들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모꼬지를 가는 등 교류협력의 길을 개척해온 유 대표님의 활동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대규모의 대북의류지원 사업이었다. 5만 여 벌의 옷을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개성 봉동역을 향해 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사회문화교류와 인도적 지원사업을 하다보니 북측 파트너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지고 경협 사업으로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14년 동안 일하면서 4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고 저 또한 5개의 단체를 거치며 남북교류협력 사업을 계속해왔다. 돌아보니 참 새삼스럽기도 하고 한편 신기하기도 하다.

대학 시절 전 교육학과생이었다. 그전까지 통일운동이니 북한문제니 시대의 흐름이 북적거리긴 했지만 솔직히 별 관심 없던 사람이었다. (웃음) 대학 땐 교육운동이 제 관심사였고, 막연하게나마 북한에도 아이들이 있으니 관련된 뭔가를 할 수도 있긴 하겠다는 정도였다.

대학원에 진학한 1996년 한겨레신문사와 어린이어깨동무에서 ‘안녕 친구야’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대학생 100여 명을 총괄할 인력으로 당시 석사생인 제가 합류하게 됐다. 교육을 매개로 평화교육, 그리고 북한 어린이돕기운동으로 확장된 제 커리어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2002년 첫 방북했을 때도 저는 평화교육 하는 사람으로 간 거였다. 그러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북업무를 시작하게 됐다.

제가 속해있는 단체인 사단법인 어린이어깨동무는 대북인도지원 단체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대북지원사업이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남북 간 통합의 과정으로서 남북 어린이들에게 평화교육을 하는 것이 단체의 설립목적이고 인도지원은 수단이다. 처음에는 이 둘을 병행하는 게 원체 고돼서 하나만 집중해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서 보면 평화교육과 인도지원이라는 두 사업이 선순환하며 어린이어깨동무의 정체성과 설립목적을 달성해 왔던 것 같다.

어린이어깨동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했다. 평화교육을 열심히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왜 매진해왔는지 알게 됐다.

우리 단체가 대북지원 단체로 알려질 거라곤 아무도 당시에 생각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통일이라는 게 왜 항상 군사적, 정치적, 성인중심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시작이었으니까. 어차피 통일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건 아이들이지 않나. 그래서 아이들부터 준비하자 하고 단체까지 설립하면서 시작했는데 때마침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난 문제가 심각한 게 알려졌다. 당장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려고 한 대북지원 사업이 어쩌다보니 메인으로 보이게 됐다.

기억에 남는 일들

다들 엄청나게 특별한 계기가 있다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어서 남북관계라는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겐 여전히 생소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뭔가 이 분야의 매력이 있어서 아닐까.

남북교류협력이란게 어떤 분야든 그렇겠지만 특히 남북여성교류는 정말로 힘들다. 다른 분야처럼 남북관계에 큰 영향을 받지만 반드시 그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여성교류를 추진하는 우리 여성단체들의 기반이 안정적이지 못한 데서 오는 영향도 크다. 저는 남한 여성단체들이 남북교류를 할 때 겪는 수많은 어려움을 통해 우리 사회 내에서 여성단체들이 처해있는 위치의 문제를 보게 된다. 남북교류협력에 여성 이슈가 더해지면 단순히 남과 북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중첩적 구조가 여성으로서, 또 학자로서 제가 남북여성교류 분야에 관심 갖고 천착하게 된 가치, 매력을 느낀 지점이다.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하니 하나 생각난다. 매년 연변대에서 남북한과 중국의 학자들이 모여 공동학술회의를 개최하는데 저는 2018년에 참석했다. 쉬는 시간에 캠퍼스를 산책하다가 익숙한 얼굴을 봤는데 10년 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과 한 공동학술회의에서 만났던 여성 교수님이었다. 2007년 당시에는 다시는 못 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10년이 넘게 지나서 우연히 만나니까 이상하리만치 반가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떤 만남은 아무리 반가워도 지속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생각. 그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인데, 이 아픔을 늘 느껴야 하는 게 남북교류협력의 현재 주소다.

결국 ‘사람’인 것 같다.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는데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의 박영희 선생이다. 남북여성교류 사업을 할 때 꼭 만나게 되는 사람으로 때에 따라 다양한 소속과 직함을 가지고 현장에서 늘 만나는 분이었다. 나와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이지만 같은 여성으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커리어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를 기분이 들곤 했다. 북한 사회에서 대남사업이라는 분야는 특별한 정치적 문제만 없으면 같은 인물이 계속 그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정이야 어떻든 그들도 남북관계가 잘 풀리길 역시 바랄 것 같다. 그래야 여성으로서 삶의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일한 분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인간적인 정이 생긴다. 부침을 거듭하는 남북교류 속에서도 어떻게든 연대와 협력의 끈을 놓치 않기 위해 우리만 노력하는 게 아니라 북측 파트너들도 애쓰는 걸 볼 수 있다. 결국 우리의 노력이 남북 간 신뢰를 구축하는 데 작은 주춧돌을 놓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많은 보람을 느낀다.

5.24조치 등으로 남북교역이 중단되면서 손해를 입은 우리 기업인들과 함께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천막 농성을 했던 240여 일간의 경험은 제게 남북교류협력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깊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사실 대학 다닐 때도 시위 한 번 안 해 봤던 저로선 처음엔 괜히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농성장에 온 많은 교역·경협기업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사업경험들, 생생한 남북교역 현장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개최한 사진전 등을 통해 제가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하게 된 것이다. 남편과 연애할 때 자주 가던 그 많던 조개구이집들이 왜 사라졌는지, 우리 아이 어릴 때 입혔던 색동 한복을 만든 공장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렇게 제 일상 속에 스며있었던 남북교역의 결과물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남북교역 사업을 한 기업인들도 다 이윤을 목표로 했지만 다른 기업활동에서 느낄 수 없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자신이 통일의 씨앗이 되고 통일의 과정을 만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고들 한다. 오랜 기간 다른 체제에서 살았기 때문에 교역사업 초기에는 많은 갈등도 겪지만 점점 북측 파트너와 손발이 맞아갈 때, 그 결과 더 좋은 상품을 우리 국민들에게 선보이게 될 때 느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남북경협의 가치에 대해 저도 모르게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람이다. 제가 어떠한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어린이어깨동무가 ‘북녘어린이들에게 쌀을’이라는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행사 시작 1시간 반 전 쯤이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서너명이 그 작은 몸에 자기들 등짝만한 배낭을 메고 왔더라. 그 배낭에는 쌀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이들 생각엔 자기들이 빨리 와서 쌀을 내면 더 빨리 북쪽 아이들이 받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거다. 그래서 아직 다 꾸려지지도 않은 접수테이블로 와서 빨리 북쪽 친구들에게 쌀 보내주라고 하더라. 종종 주변사람들에게도 말하는데, 어깨동무 영상을 볼 때 눈물이 안나면 제가 그만둘 수 있을거라고 한다. 난 그 행사를 준비하는 담당자인데도 그 아이들처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 작은 아이들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남북교류사업을 해야할지, 그 초심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다.

전 기질적으로 안정지향적인 사람인데 대북사업은 늘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추진해야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북측을 상대하는 일은 항상 가변적이라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방북해서 일할 땐 모르다가 다시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은 마치 출산할 때처럼, 진통 한참 하다가 아이가 마침내 쑥 나올 때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만큼 압박감이 심하다. 그런데도 제가 계속 이 일을 하는건 결국 사람이다. 남한 사람일때도 있고, 북한 사람일때도 있고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편안하고 반가운 사람들이 동력이 된다.

‘여성’으로 일하며 느낀 소회

남북관계·통일 문제가 모든 국민들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동시에 정치적 의제의 성격이 강해 남성중심적 색채도 적지 않다고 본다. 특히 북한이 아무래도 가부장적 문화가 우리 사회보다 더 강한 편인데 북한 파트너들과 사업할 때 애로사항도 있었을 것 같다. 여성으로서 이 분야에서 일하며 경험하신 소회들이 있을 것 같은데.

처음 제가 대북사업을 할 때는 여성 활동가가 거의 없었다. 여성주의에 대한 특별한 생각 없이 일했는데 지금 보면 당시의 제게 ‘여성’으로서 모델링할 만한 선배 활동가가 거의 없었던 게 아쉽다. 그때는 북한도 성별이 여자인 사업 상대방인 저를 대하기 어색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한의 여성 활동가들이 점점 많아졌고 북한도 점차 적응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저도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커리어에 있어서 더 드러낼 수 있었고 일하는 방식에서도 목적지향보다는 과정을 지향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했다. 대북인도지원 분야에서 여성 실무자들은 대규모 방북할 때나 갈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북측 상대방은 항상 남성이었다. 그때부터 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있었더라면 북측에서도 여성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가끔 대규모 방북 때 만난 북측 여성 실무자를 다른 사업 현장에서 보게 되면 괜히 서로 더 반가워 하곤 한다.

저는 학술회의 중심으로 북측과 교류하는 기회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도 그렇긴 하지만 북한에서는 여성의 대표성이 상당히 낮다. 최혜경 총장님 말씀처럼 남북교류협력 분야에서 오래 활동하신 여성 활동가들이 말씀하기로는 여성교류 사업 말고 다른 분야에서 여성 담당자가 등장하면 북측에서 처음에 상당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다보면 북측에서도 여성 담당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점차 변화하는 것 아닐까?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도 남북교류 분야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나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남북문제에 있어서 여성은 부차적인 것으로 종종 인식된다. 교류협력에서는 다른 중대한 이슈도 많은데 무슨 여성교류냐는 식으로, 주요 회의나 포럼 같은 곳에서는 주로 남성 전문가들로 구성된 사이에 한두명씩 여성 전문가가 끼어있는 식이다. 저도 그 덕에 여러 회의에 참석할 수 있긴 하다. 다만 중요시하는 지점이 좀 다르다. 남성들이 듣기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도 저에겐 중요한 이슈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왠지 제가 비전문가로 비춰질 것 같고, 그렇다고 주류 남성의 이야기만을 한다면 여성주의적 이슈를 도외시하게 된다는 데서 딜레마를 느끼곤 한다. 이 두 부분을 조율하는 것이 참 어렵다.

남북여성교류, 여성평화운동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물적 기반이 없다는 것이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초창기 대북인도협력 사업 같은 경우에는 후원자들 중 여성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것이 여성의 역사로 기록되지 않았다. 여성들의 참여와 기여가 상당했지만 여성단체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는 초기의 그 활발한 에너지를 여성들의 독자적 활동으로 묶어내지 못했다는 것에 반성과 아쉬움을 느낀다.

남북관계나 분단의 이슈는 정치·군사화된 측면이 크기 때문에 젠더적 분석은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그리고 남북관계라는 대주제 아래 백화점식으로 여러 세부이슈를 다루다보니 적절한 선택과 집중이 어려운 구조다. 그러다 보니 젊은 여성 활동가들이 역량을 키우거나 지속가능한 활동 역량이 재생산되는 프로세스를 만들기 어려운 점이 있다.

저는 대북사업할 때 여성으로서의 장점이 있었던 것 같다. 실무 협상할 때 남성 담당자들 간에 언쟁이 생기며 난항을 겪을 때는 제가 나서서 조율하기도 하고, 한번은 북측에서 김치사업 관련 남한 김치가 궁금하다길래 제가 직접 만들어 가져가기도 하는 등 여성이라 할 수 있는 좀 더 세심하고 차분한 업무 처리와 같은 강점을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가 대북사업 실무를 하던 시절에는 젠더 이슈는 거의 전무한 시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북측 파트너 중 여성 담당자를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 만나는 북한 여성이라면 식당 종업원들이나 출입사무소의 군인 정도였는데, 여성 파트너가 나와서 함께 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말씀하신 부분은 아직은 북한의 여성 인재들의 역량이 미흡한 데에서도 일부 기인한다고 본다. 남북여성교류 행사를 하면 북한에서 온 참석자들은 다 여성이지만 책임자는 남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무자부터 대표까지 다 여성들이니 북한에서도 자극을 받는 것 같더라. 자신들은 여성 리더십에 있어 아직은 충분히 훈련되지 못했다며 여성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여러 활동들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자꾸 전략적으로 여성을 배치하고 나가야 북한에도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한다. 김여정 부부장이나 최선희 제1부상 같은 사람이 정상회담 같은 주요한 자리에 나오는 것 보며 우리도 일부 자극을 받듯 여성 리더십에 대한 롤모델을 남북이 서로 주고받기 하면서 긍정적 시너지를 확대해 가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올해 남북교류협력 전망과 주요 계획

마침 남북교류협력의 각 분야별로 한분씩 전문가들이 오셨다. 올해 남북교류협력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그리고 올해 주요 방점을 둔 사업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하다.

저는 올해 남북교류협력 전망이 그리 긍정적이진 않다고 생각한다.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이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면 굳이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얻을 이익이 크지 않다고 평가할 것이다.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약 2년을 지켜보고 대남관계 단절이라는 결정을 내린거 아니겠나. 우리 정부의 입장에 큰 변화가 없다면 북한에서도 남북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설 실익이 없다. 근데 이건 대북사업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항상 최악을 상정하고 사업을 준비해야 여러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후배들을 생각한다면 현재같은 상황을 그대로 넘겨줄 순 없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정부의 역할도 있겠지만 민간영역에서도 치열하게 노력할 거다.

그래서 올해는 내려놓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과거 남북교류가 활발하던 전성기의 경험은 좋은 자양분으로만 삼고, 앞으로 대북협력이 재개되면 예전과는 완전 다른 스타트 라인에 선다고  생각한다. 나의 성공 경험이 앞으로도 정석이리란 법은 없지 않나. 리셋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에 사업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 또한 과거의 경험은 내려놓고 무엇을 가지고 북한과 협력해야할지 새롭게 고민하려고 한다.

전 과거와 다른 남북교류협력의 새 판이 짜이긴 해도 완전히 뒤집어질 정도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성실하게 교역사업을 하셨던 분들의 경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부침이 한 두 해 일은 아니지 않나. 솔직히 안 어려웠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교역 경협분야 종사자들은 시도하고 개척하고 도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일궈왔다고 본다. 오랜시간 멈춰있어 다시 도약하는 법을 잃진 않았을까 우려도 되지만 민간은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릴 것이다. 정부도 최선을 다해 민간의 노력을 지원해주면 좋겠다.

올해는 남북경협의 소중한 역사가 묻히지 않도록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 해 서울시에서 서울시에 남북교역 기업이 몇 개나 있고 어떤 사업을 했는지 등을 담은 「남북경협편람」을 발행했는데 그 과정에 참여한 바 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저는 그 기업들의 상세한 스토리를 담은 백서를 만들고 싶어 올해 사업으로 계획 중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이든 정부가 미국 중심의 구도 속에서 전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고 하고, 남북관계는 그 하위구조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근 전직 주한미군 사령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미연합훈련과 관련해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Ready to fight tonight’ 즉 오늘 밤이라도 당장 전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한미연합훈련의 본질이라고 발언했다. 또한 연합훈련을 중단하면 대북협상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식으로 바이든 행정부를 압박하는 미국 내 전문가 의견들도 많다. 이런 점이 우리 정부로서는 더 어려운 부분이다. 북한은 지난 8차 당 대회에서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남북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내걸었으니 우리 입장이 난처한 모양새다.

그래서 올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근본적인 문제, 즉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분쟁을 한반도에서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까, 소극적 평화가 적극적 평화가 되도록 여성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풀어가는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해에는 다소 어려웠지만 올해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종전 평화캠페인을 전개하려고 한다. 다른 교류협력 분야는 제가 아니더라도 관심갖고 준비하는 분들이 많다. 궁극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 한반도의 종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저와 제가 속해있는 평화를만드는여성회와 같은 시민사회에서 할 일인 것 같다. 이를 위해 남북간 여성교류를 재개하기 위한 시도도 해볼 생각이다.

남북관계 전망은 개인적 소망을 담아 좋았으면 할 뿐이다. 이 소망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한미군사연합훈련이 남북관계에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바 코로나19 상황도 맞물려 있으니 이를 활용해 군사분야에서 남북대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국민들이 남북관계 개선이나 평화와 같은 주제에 냉담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이를 극복할 담론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비용을 다른 식으로 전환시켰을 때 지금과 같은 코로나 비상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와 같은 논리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남북협회에 하는 당부

여성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좌담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됐다. 마지막으로 남북협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연구와 관련해 최근 남한의 여성경제인들을 만났다. 남북교류에 있어 경제협력이 가지는 의의가 크지 않나. 그런데 정작 우리 여성 경제인들이 남북경협에 관심은 많아도 어디서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더라. 기존의 남북경협 관련 아카데미가 있긴 하지만 여성이 소수고 남성중심적 언어와 네트워크 방식으로 인해 소외되기도 하는데, 남북교류협력에 관심있는 각 분야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여러 프로그램이 생기면 좋겠다.

저도 비슷한 요청이다. 요새 젊은 여성들이 공공외교나 글로벌 스탠다드, UN과 같은 국제기구 등에 대해서는 관심도 많고 역량 있는 차세대 인재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는데, 남북여성 분야는 참 척박한 게 현실이다. 앞서 있는 사람으로서 실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우리가 취약했구나 하는 반성도 한다. 남북교류협력 분야에 미래 세대의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게 하려면 이 분야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거다. 자신의 일자리, 커리어 발전에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북교류 전성기의 경험을 가진 우리 세대야 그때 추억때문이라도 의지를 가지고 버틸 수 있지만 새로운 세대들에겐 그럴만한 동기가 없지 않겠나. 그러니 정책적으로 남북협회 같은 곳에서 남북교류협력 분야에 젊은 여성 리더십을 키워내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