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정치·군사 분야 합의
이행을 위한 방향과 과제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출처 : 연합뉴스(무단 사용 불가)

2018년 남북합의 이후 현 상황

"평양 시민 여러분,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오늘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또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연설의 한 구절이다. 평양 시민들 앞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육성으로 핵무기와 핵 위협 없는 평화를 직접 주창한 세기적 사건이었다. 당시의 남북 합의는 미완의 선언이다. 남북 군사합의서처럼 그나마 지켜지고 있는 항목도 있지만 이행되다 멈춘 것도 있고 미처 시작하지도 못한 내용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논의되다가 멈춰선 사항도 있다. 이후 공동선언의 실행 과정에서는 아쉬운 점도 많고 심지어 북한은 이에 대한 비방을 막말에 가깝게 터뜨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군사합의서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것은 9.19 평양 남북공동선언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9.19 군사합의는 2017년까지의 남북 긴장 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중요한 남북합의로, 여전히 남북 당국이 준수하고 있는 평화 체제의 시금석이다. 9.19 군사합의는 또한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뒷받침하는 남북 재래식 군비통제 합의로서, 비핵화 협상과 재래식 군비 통제를 병행함으로써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킨 전환적 프로세스라는 점 또한 기억되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막말 비방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군사합의서의 유지를 남북협력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2018년 4.27일 판문점 선언 당시의 공연 “봄이 온다”의 감동이 언제였는가 싶을 정도로 남북관계는 급전직하로 얼어붙었다. 최근 김여정 부부장이 “3년 전의 따뜻한 봄날은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찬물을 끼얹어 기대와 열망은 식을 대로 식어 있다.

2019년 8월의 미스매치

필자가 보기에 남북관계가 악화된 결정적 계기는 2019년 8월이다. 6월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미 3자 회동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8월 한미군사연습의 중단을 요구했다.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군사연습을 중단하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볼턴 보좌관은 그의 자서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뒤집는 과정을 자세히 쓰고 있다. 7월 24일 한국을 방문한 볼턴 보좌관은 에이브럼스 주한 미사령관과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와의 회동에서 반대를 이끌어 내는 등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여러 작업을 통해 결국 트럼프 대통령을 역설득하였다. 8월 군사 연습을 강행하게 된 배경이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이 군사 연습을 극렬히 반대했고 훈련 시기 초대형 방사포 등을 포함한 이른바 3종 세트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행하는 등 강력한 반대 행동에 돌입했다. 8월 17일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보좌관을 거세게 몰아세우며 한미군사연습을 강행한 것을 후회한다며 술회하지만 북미관계의 회복은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한편 이 상황에 대해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한 우드워드 책 『분노』는 2019년 8월 6일자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 친서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대화와 군사 연습이 병행될 수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한다. 이어 남북관계를 언급하며 김위원장은 “남조선의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우리를 주적으로 규정”하였음을 강력히 비난한다. 소위 남한 책임론을 분명하게 제기하는 장면이었다. 이전까지의 한국 중재자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 본격적으로 한국 책임론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직후인 8월 16일 조평통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일,” “태산명동 서일필”이라는 망언으로 문대통령을 직접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음을 경고한 것이다.


강력한 국가방위력은 결코 외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에로 추동하며 그 성과를 담보하는 위력한 수단으로 된다.


북한의 정치 군사 상황과 의도

북한은 2021년 1월부터 진행된 8차 당대회 기간 대미 노선과 대남 노선에서 원칙론을 강조하였다. 김 위원장은 미국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 강대강, 선대선(power to power, good will to good will) >의 원칙을 내세우며 국방과 외교를 병행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강경론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라면 자신들 역시 강경론을 견지하겠다며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실체와 본심은 변함없다”는 원칙론을 반복하였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는데 있다”며 대미 조건부 대화론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군사 부문에서 북한은 핵 고도화와 핵무기 증강 계획을 밝히고 원자력 잠수함, SLBM, 군사정찰위성, 각종 전술핵무기, 다탄두 미사일 등을 언급하여 국방력 강화 기조를 재확인하였다. 이례적으로 당대회 다음날 이루어진 열병식에서 북극성 5호 등 비대칭 무기 체계의 일부를 공개하여 주변국을 긴장시켰다. 특히 전술 핵무기를 강조하여 실전 배치 여부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당 대회 총화 보고에서 김 위원장은 “강력한 국가방위력은 결코 외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에로 추동하며 그 성과를 담보하는 위력한 수단으로 된다”고 하여 대미 대남 협상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 행성에 우리나라처럼 항시적인 전쟁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는 없으며 그만큼 평화에 대한 우리 인민의 갈망은 매우 강렬”하다며 평화를 위한 협상을 북한 주민들이 가장 바라고 있다고 언급하여 자신들의 국방력 강화론이 불러올 오해를 해명하는 듯한 이중성도 보였다.

남북 합의 이행 방향

현실적으로 북한의 대외 행동을 좌우하게 될 미국의 대북정책이 조금씩 구체화되어 가고 있는 양상이므로 그 긍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바이든 행정부를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오판을 막고 조급증을 달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 간 불필요한 충돌을 방지하여 익어가는 협상 테이블이 깨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특히 우리로서는 미국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9.19 군사합의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은 남북 간 충돌 방지, 한반도 평화 정착에 직접 기여할 뿐만 아니라 북한이 비핵화에 호응해 나올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향후 미국이 제기하는 북미 협상 프레임은 군비통제협상 체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북한의 핵 능력을 인정하는 가운데 동결을 중심으로 한 잠정 협상 체제를 협상의 출발점으로 하고, 이를 유지하는 가운데 추가의 도발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핵 위협을 감소하는 새로운 다자 협상 프레임을 만들자는 것이다. 사실상 협력적 위협감소(Cooperative Threat Reduction) 프로그램을 가동하자는 것이다.

이에 맞추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북미간 동결 협상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작된다면 이 과정에서 진행할 수 있는 관광, 인도주의협력 등의 남북협력이 유엔제재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으로 하여금 이같은 관여정책으로 나서게 유도하는 협상은 한미관계에서 이루어지겠지만, 동시에 진행될 자율적 남북협력을 가시화하는 것은 대북 메시지로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출발점이다. 북한의 격리식 코로나 방역이 가져온 경제난을 직접 타겟팅하는 규모 있는 대북 지원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은 이후 지속 가능한 남북협력이 유엔이나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자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이후 본격적인 군비통제 협상이 시작될 때에는 제재해제-도발방지-비핵화실행-재래식 군비축소-인권문제해소 등의 다양한 거래 대상이 되는 재화들 간의 적절한 교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특히 인권 문제가 본격적인 협상 대상으로 제기될 때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방향은 자명하다. 미증유의 협상이라는 점에서 먼 미래의 일인 것 같지만 막상 눈덩이가 굴러가면 그 속도를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요컨대 기 합의된 남북 합의를 잘 지키는 것과 함께, 한국 정부가 향후 자율적으로 남북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다는 자율성을 보여주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북미 협상의 성공과 실패 모두를 대비하는 한국 정부의 미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