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문화재교류,
최광식 전 장관에게 듣다.

이번 8월호에는 6월호 참여마당에서 독자분들이 요청하신 남북사회문화교류 관련 특별한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남북이 공유하는 역사, 문화재에 대한 교류협력을 오랫동안 이끄셨던 최광식 前 장관님께 과거 남북문화재교류의 경험과 미래의 방향에 대해 듣는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이 력

ㆍ1995~2018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국사학과 교수

ㆍ2014~2016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위원장

ㆍ2011~2013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ㆍ2011 문화재청장

ㆍ2008~2011 국립중앙박물관장

ㆍ2000~2008 고려대학교 박물관 관장

ㆍ2004~2005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ㆍ2003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ㆍ1998 ~1999 단군학회 연구이사

실무자, 역사학자 그리고 관련 정책 결정자로서 교수님만큼 남북문화재교류를 다방면에서 폭넓게 경험하신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남북문화재교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남북문화재교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1998년 단군학회 연구이사직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 시기 ‘단군과 민족문제’에 관한 남북한 학술교류 및 공동학술회의를 개최관련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고구려를 중요시 하고, 남한은 신라를 중요시하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원시조 즉, 고조선 단군의 똑같은 자손이 아닌가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원래 하나이며 통일의 고리도 역사라고 봅니다. 고구려와 신라가 전부 고조선으로부터 나온 것 아닙니까? 단군을 민족의 시조라는 공동인식을 기반으로 남북문화재교류를 통해 남북이 역사를 함께 지켜나가야 합니다.

강서대묘 조사 전 고사를 지내는 모습
(가운데 최광식 전장관)(출처: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었을 때 2003년에 발족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에 중국은 유네스코에 고구려 벽화고분을 중국의 이름으로 등재하려고 하는 상황이었고, 이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려고 했지만 고구려 관련 유물은 북한에 있었습니다. 2003년 12월에 북한에 가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회의를 진행하고 북한의 고구려 벽화고분 유네스코 등재 지원과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개최 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서 북한에서도 참석할 수 있도록 협의를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남북역사학자협의회 활동도 병행하면서 2005년에는 북한에서 고구려 유물을 빌려와서 고구려특별전을 고려대 박물관에서 개최하기도 했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촬영, 보존학자들과 함께 방북하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고구려고분군 조사작업 사진(출처:남북역사학자협의회)

호남리사신총 현무(출처:남북역사학자협의회)

공직을 맡으시기 전에도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부위원장과 고구려특별위원장 등 남북문화재교류를 일선에서 직접 진행하셨습니다. 긴 시간 남북역사문화재교류 현장에 계시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남북문화재교류 사례와 그 의미를 무엇일까요?

앞서 말한 고구려 고분벽화 사업과 함께 개성 만월대 사업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우리나라 왕조의 도성 중 유물이 잘 남아있는 곳이 고려의 수도 개성이며, 개성 만월대는 고려사에서 의미가 큽니다. 관련 사업은 2006년도에 처음 논의가 되었는데 그때는 개성 방문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무산이 되고, 2007년에 만월대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었던 저는 통일부장관을 만나서 남북역사문화교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며 설득했습니다. 다시 추진된 만월대 사업은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중단되었습니다. 문화재청장이었던 2011년 7월, 장마가 크게 왔을 때 만월대를 발굴하다 그냥 덮어두고 온 유물들이 걱정되었습니다. 당시 통일부장관이었던 류우익 장관에게 가서 뚜껑 딴 통조림 비유를 하면서 개성만월대 사업 재개를 설득했습니다. 통조림을 개봉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개봉 후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이미 시작한 사업은 진행하게 해달라고 설득하며 사업을 시작하는데 힘을 실었던 기억이 납니다.

개성만월대 사업 중에서 금속활자 발굴이 역사학적으로 큰 성과였습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200년 더 앞섰다는 것은 금속활자가 아니라 직지심체요절의 책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금속활자가 1점씩 보관되어있었지만 그것은 골돌품상을 통하거나 학생이 땅에서 주운 것으로 학술적 발굴은 아니었습니다.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해서 금속활자를 출토했다는 것은 유물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만월대 발굴조사는 주로 발굴이 진행된 서부 지역이 아닌 아직 발굴 시작을 하지 못한 동부 지역 연못을 발굴하면 중요한 유물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국 땅은 산성이기 때문에 유물이 발굴되기 힘듭니다. 하지만 연못, 호수는 알칼리성 토양이기 때문에 유물이 보존되기 유리한 상황입니다. 경주를 예로 들면 다른 지역보다 안압지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만월대 발굴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하더라도 70년 정도 걸릴 겁니다. 

개성만월대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출처:남북역사학자협의회)

직접 사업을 진행하면서 많은 북한 분들과 접촉해보셨을 텐데요. 북한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었는지, 사업을 추진할 때 북한에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북한 사람과 처음 만난 시기는 아까 말씀드린 단군 학회에서 연구이사직을 맡으며 1999년에는 북경대학교 교환교수로 한 학기 재직할 때였습니다. 이후 2002년에 제1차 남북공동학술토론회를 개최했으며, 개천절 행사에서는 학회 실무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그 시기에 단군릉과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았습니다.

단군릉에 가서 단군과 단군 부인 유골까지 직접 봤습니다. 북한은 단군릉이 5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북한에서는 만년 단위로 연대를 측정하는 전자공명연대측정법을 사용하지만 보통은 천년 단위로 측정하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합니다. 연대 측정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 중국, 러시아, 유럽 등 여러 나라로 유물을 보내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받자고 제안했지만 북한은 단군 유골에서 뼈를 떼어내는 것을 반대 했습니다.

연대 측정이 다시 이뤄지지 않으니 남북 학자들의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계속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단군릉이 있다고 한다면 당시 초기 고조선의 수도인 요동지방에 있어야 할텐데 북한은 이장을 했다고 하는데 증거가 없었습니다. 또한 부부 합장은 중국도 한나라 때부터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장례문화입니다. 이런 여러 이유들과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단군 관련 사업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학술 교류가 계기가 되어 북한과 교류를 시작하고 고구려와 고려 시대 문화재 교류를 하게 되어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개성만월대 발굴 유구 모습(출처:남북역사학자협의회)

장관 취임하실 때 청문회는 통일부장관 청문회였다고 할 정도로 남북교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학자로서, 정책 결정자로서의 경험으로 보실 때 현재 남북문화재교류가 가지는 문제점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꾸준히 지속되어야 하는 문화재교류가 정치 정세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행되었던 개성 만월대, 고구려 고분벽화 그리고 백두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만큼 중요한 곳이 백두산 지역입니다. 남북이 통일 되었을 때 간도지방이 논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백두산정계비 조사부터 남북 공동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진행과 멈춤이 반복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남북문화재협력교류위원회를 남북이 공동으로 구성해서 관련 예산과 담당하는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합니다. 이 곳에서 문화재 발굴, 남북공동협의를 진행할 수 있는 위원회 산하에 재단을 만들어서 남북 교류가 정체상태일 때는 교육이나 전시를 진행하고 홍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남북 문화재와 유물을 알게 해서 대중들이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요즘 청년들이 통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북한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형제라고 말하기 가장 좋은 소재가 문화재이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남북문화재교류가 꾸준히 이루어지기 위한 정례화된 기구에 대해서는 적극 공감합니다. 기구 설립과 함께 남북의 문화재교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남북문화재교류는 정보화, 국제화되어야 합니다. 남북문화재교류의 결과물을 디지털 콘텐츠로 만들어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콘텐츠를 어떤 사람은 게임으로 만들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소설을 쓸 수도 있습니다. 콘텐츠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 문화적으로 남북 문화 교류의 결과가 남한에서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개성 만월대 등 그 동안의 수집한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그 정보를 영어 버전 등으로 만들어서 국제화해야합니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 역사가 우리의 것임을 국내외로 알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에 있는 문화재를 한국에서 디지털화 한다면 그 또한 남북문화재 교류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경우 비주얼적이기 때문에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 북한과 접촉을 통해 더 많은 문화재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남북문화재교류 추진 과정에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합의를 만들어가고,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꼭 해야 하거나, 절대 주의해야 하는 것처럼 교수님의 노하우를 알려주시면 새로 남북문화재교류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도 진심을 알아봅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가 북한에서 문화재교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사업이 아닌 민족의 동질성 확인과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문화재 교류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 동안 중국에 10여 차례, 북한에 20여 차례 다니면서 직접 느낀 것인데 북한 사람들도 사심 없이 순수하게 다가간다면 원만하게 협조 해줬습니다.

또한 남북문화재교류는 민족의 일이지 정치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기에 지속적 문화재교류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면서 했던 말은 “통일운동은 좌파만 하는게 아니라 우파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재를 지키는 것은 정치이념에 따른 좌도 우도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남북문화재교류를 추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