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ICT 교류를 위한
작은 제언
ETRI 한반도 IDX TF1) 반장
허재두 책임연구원
필자는 지난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을 할 즈음엔 남북 관계가 전환기에 접어들어 남북의 도로와 철도가 연결되고, 과학기술교류도 진행되어 한반도 통신 인프라 연동에 대한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동안 남북 엔지니어들은 주로 중국에서 ‘동아시아 IT포럼'을 통한 리눅스 기술 협력방안, 산업응용 SW, 남북 IT용어표준화 추진 등을 해왔다. 정부출연연구소 중심의 ICT 합동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주제를 논했지만,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 훈풍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출근길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북한 시민들을 보면서 남북이 ICT로 초연결되는 세상이 되는 꿈을 그려보기도 한다. 앞으로 남북 통신인프라가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작은 제언을 해 보고자 한다.
우선 남북이 상이하게 사용하는 ICT 분야의 통신방식 인터페이스를 위한 기술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초연결 세상의 인프라는 5G와 같은 이동통신기술이 근간이고 4차 산업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차세대 이동통신 분야는 북한 입장에서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ICT 인프라의 구축이란 점에서 훌륭한 경협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생소한 북측의 오라스콤社(이후 CHEO technology 합자사 공동관리)가 설치한 고려링크, 강성네트, 별 등 3G 기지국과의 연동을 위한 방식을 파악하고 통신환경 고도화를 위한 제반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정책적 규제가 아닌 순수하게 미래의 한반도 인프라 구축을 위한 알고리즘 차원의 과학기술적 네트워킹 접근방식을 논해보자는 것이다. 얼마 전 삼성전자가 미국의 디시네트워크(DISI network)에 5G 이동통신 장비를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우리가 개발한 가상화 기지국(vRAN2)) 기술과 다중입출력장치(Massive MIMO)를 미국 전국망에 설치하여 서비스하는 세계적 기술력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집트가 공급한 기지국 장비나 중국의 부품으로 만든 모바일 제품으로 차세대 장비를 고도화 하는건 시간과 노력에 비해 효과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2) vRAN (virtual radio access network)
MIMO(multi-input multi-ouput)
둘째, 지금 진행되는 4차 산업혁명은 글로벌 속도전이다. 새 정부에서 남북의 과학기술협력을 구체화한 후 ICT 분야에서 접점을 찾으면 늦다. 이번에 새 정부가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엔 남북 과학기술협력을 위한 어젠더가 빠진게 아쉽다. IT 강국 한반도의 앞날을 그리고 대비하는 남북 ICT 교류협력의 청사진을 미리 설계하고 과학기술협력의 속도를 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출연연구기관의 ICT 엔지니어들이 참석하는 ‘서울-평양 교차 컨퍼런스’ 개최도 제안해 본다. 지난번 평양 정상회담에 참석한 삼성전자, SKT, LG 등 회장단은 남북 경제협력·대북 사업 확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즉 실질 투자 결정권을 가진 대기업 총수들이 남북경협과 대북사업 재개에 기대감을 갖고 4차산업 선도를 위한 통신·에너지·의료보건 분야를 중심으로 대북사업을 벌일 가능성도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협력 사업이 구체화 될 때까지는 풀어야 할 걸림돌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남북 ICT 인프라 구축협력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KT, SKT 같은 텔레콤 기업의 동참이다. 북한의 '새 세기 산업혁명' ’수자경제‘와 글로벌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기 위해서 통신 인프라는 물론 ICT 분야에서 협력을 모색해야만 우리의 통신포화 상태를 극복하고 북한의 디지털 블루오션 진출이라는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 공동기지에 테스트베드를 만들어 4차산업 시스템의 전진기지화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중소기업이 참여한 개성공단을 통해서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제품화 가능성과 시장진출 효과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북한은 여러 해 동안 국제대학생 코드쉐프 프로그램경진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SW 분야에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산업 정보화를 위한 투자에 관심을 늘리면 서로 윈-윈하는 실질적 협력이 가능하리라 본다. 물론 지금은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고 단절된 상태에서 개성공단 재가동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지난번 어느 대권 후보가 제안한 것처럼 DMZ를 통한 ICT 플랫폼을 통해 남북 ICT의 공동연구 물꼬를 트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글로벌 진출을 위한 산업분야 플랫폼 구축을 통해 디지털 데이터를 공유하는 작업은 엔지니어들이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표준화를 추진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북관계 경색으로 우리 ICT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지 못하는 동안 중국과 이집트, 싱가포르, 네덜란드 등 외국기업이 진출하여 사업하고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교류 사업이 확대될 여지가 크고, 북한의 과학기술5개년계획과 연계하면 활발한 남북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ICT 전문가의 참여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현재 남북 직접 교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국, 몽골, 싱가포르, 베트남 등 제3국을 통한 재외동포들까지 포함한 남북 엔지니어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정례적으로 추진하는 방안이다. 지난해 발표된 UN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은 교육, 의료보건, 기후변화, 재난재해, 전력에너지 등 지속가능한 분야의 과학화를 표명하였다. 유럽에서 열리는 EKC(한-유럽과학기술학회), 미국의 UKC(한-미 과학기술학회)를 포함한 재외 행사를 통해 북한 산업의 과학화·정보화와 연관된 관심분야를 도출하는 장에 남북 공동 참여를 제안한다.
그동안 지질연구분야나 표준측정연구분야 등 남·북·중 국제학술대회에 산발적으로 참석한 사례는 있지만 행사추진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일부 SIG3) 모임형태로 '북한ICT연구회' '통일과학기술연구협의회' '동북아공동체ICT포럼' 등에서 △과학기술 공동협력 방안 △4차산업응용 △과학기술 인력교류 △ICT 정책표준화 과제 △모바일 콘텐츠앱 등 다양한 세부 주제로 나누어 실질적 교류협력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 가운데 ICT는 남북 공히 4차 산업혁명 분야의 근간이 되므로 협력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제언을 정리하면 ICT 교류협력은 경제협력의 핵심동력이고 다른 경제협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분야이다. 따라서 ICT 분야 남북협력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먼저 조속히 교류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ICT분야 엔지니어를 위한 협력채널 복원, ICT 교류협력 의제 발굴 및 예산확보가 중요하다. 그리고 글로벌 시장진출 및 4차산업 선도를 위한 각종 교류협력에도 통신인프라 구축협의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5G 네트워크를 이용한 이산가족의 영상통화는 인도적 차원의 서비스 제공으로 민족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한 방편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SIG (special interest group)
동북아 지정학과 남북 ICT
교류협력 가능성
북한은 제2의 베트남이 될 수 있을까?
국립통일교육원 민경태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지정학을 활용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펼치면서 세계패권을 장악하고 유지해 왔다. 1970년대 미소냉전 시기에는 소련과의 대결에 집중하기 위해 공산국가인 중국과 데탕트를 이루는 결단을 내렸다. 1969년 닉슨 독트린에 이어 1972년 미중 국교정상화를 실현하는 이른바 '키신저 전략'을 추진한 것이다. 1990년대에는 중국 경제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 경제의 개혁·개방을 지원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과 공산화로 인해 관계가 단절된 지 20년 만에 1995년 미국이 베트남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와 같이 미국은 때때로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이념과 가치를 초월하는 매우 혁신적인 지정학 전략을 펼쳐 왔다.
베트남은 한반도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국가이다. 비록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되었지만, 북한과 미국이 베트남을 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만약 북한이 제2의 베트남과 같이 변화할 수 있다면 동북아 지정학 구도에서 다시 한번 대전환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 후 약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상 현상 변화보다는 기존의 냉전적 대립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한다면 동북아에서의 미국 군사력 유지를 위한 명분이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지정학적 충돌 위험이 고조되고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되면서 미국의 동북아 지정학 전략 변화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봉쇄에 대응하여 남태평양 섬나라 솔로몬제도와 안보협정을 맺는 등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 상당기간 중국이 미국의 군사력을 능가하기는 어렵겠지만 향후 5년이 지나면 중국 근해에서 만큼은 해군력이 역전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대만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면 단순히 지역분쟁으로 머물지 않고 한반도 전쟁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고 군사 전략가들은 경고한다. 미국 입장에서 관리 대상지역이 여러 곳으로 늘어나고 전선이 확대되는 것은 불리하다. 동아시아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북미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북한 핵능력은 점점 고도화되고 있으나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마땅한 방안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하여 유엔 안보리에서 규탄 성명을 채택하거나 추가 제재를 가하려는 시도도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중·러의 협조가 필수적인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을 압박해 비핵화를 추진하겠다는 전략은 이제 더욱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공격 능력을 사전에 무력화시키는 ‘킬체인’과 같은 선제타격 방안은 군사적 대비책으로는 준비해야 하겠으나 이를 실제로 실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북한의 핵능력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다면 보복 공격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비록 전쟁에는 승리한다고 해도 사실상 남북이 공멸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공격 능력이 낮은 수준이었을 때 미국이 적용했던 '전략적 무시'나 '전략적 인내'로 회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와 같이 한미동맹의 입장에서도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동북아의 냉전적 대립구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을 활용한 지정학의 대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전 세계적인 경제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한을 활용하는 전략도 검토할 수 있다. 중국을 대체하는 생산기지로서 북한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을 경제안보 차원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한국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고, 저기술 분야는 북한과 협력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급망 분리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포린어페어스> 기고를 통해 한국은 북한에 투자해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미국이 구매하는 남·북·미 협력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이 보유한 지하자원과 희토류 개발에 한·미가 공동으로 전략적 투자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23일 출범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경제블록 진영 내에서 안정성 있는 공급망 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여기에서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친환경 녹색기술 등 핵심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안보·경제·첨단기술·공급망을 망라하는 포괄적 글로벌 동맹으로 한미동맹의 성격도 확장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남북한이 경제적 협력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면 글로벌 경제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 삼성전자의 휴대폰 공장만으로도 협력업체를 포함한 현지 고용인력이 한때 16만 명에 달하고, 생산액은 베트남 국가 전체 GDP의 20%를 차지했다.
베트남의 경제규모가 북한의 약 7배 수준인 것을 감안한다면, 휴대폰 공장이 북한에 세워졌을 경우 국가총생산이 2.5배나 단숨에 증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첨단기술과 자동화된 공정을 바탕으로 하는 반도체나 LCD 패널 생산시설을 북한에 도입하는 것은 고용유발 효과나 시장진출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ICT 관련 전자제품 생산업종 중에서도 휴대폰 조립산업과 같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는 북한의 경쟁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음을 베트남의 사례가 보여준다. 첨단 통신 시스템 분야에서도 HW 의존성을 낮추기 위한 OpenRAN 표준화가 추진되고 있다. 만약 남북한이 협력한다면 북한에서 생산된 통신장비를 전 세계에 공급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경제안보의 중요성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동북아 지정학 구도를 전환하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상 변화를 추구하는 전략이 아직 한·미의 외교안보 정책결정자들에 의해 유력한 대안 중 하나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재 동북아의 지정학적 대립구도를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한미 동맹에 불리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이념과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유연한 지정학 전략 변화를 추구해왔던 미국의 입장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와 번영을 확보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도 현상 변화의 필요성은 높아지고 있다. 과거 미국의 보수적인 닉슨 정부가 매카시즘을 불식하고 중국과의 데탕트를 이루었듯이, 그리고 한국의 노태우 정부가 중·러와 수교하고 성공적인 북방정책을 펼쳤듯이, 매우 엄중한 시기에 출범한 한국 정부가 북한을 제2의 베트남으로 만들고 동북아 지정학의 대전환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