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평양

이형구(가명)

여러분의 고향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 고향은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면적, 인구, 상징 등의 정보와 다를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고향은 어린 시절 세상을 배우고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쌓던 곳이니까요. 문득, 북한을 고향으로 둔 분들의 추억은 어떤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웹진 <이음>이 야심차게 기획연재를 준비했습니다! 2024년 1월호부터 북한이탈주민이자 협회의 경제전문가 자문위원 여섯 분의 고향 에세이를 연재할 예정인데요, 북한이탈주민이 각자의 고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기억들을 나열해보고 공유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고자의 이름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별명이나 가명으로 게재하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2024년 새해 첫날 나는 또다시 속초 앞바다를 찾아 떠오르는 첫해를 맞이한다. 바닷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뚫고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새해의 첫 태양을 보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소원을 빌고 기도할 때, 나 역시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평소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처가 식구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지만, 이날만큼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위해 기도한다. 올해만큼은 불효한 자식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길 바라며······.

나의 고향은 평양, 부모님은 아직도 평양에 계신다. 6·25전쟁 기간 조부모님들의 등에 업혀 평양으로 가신 부모님들의 고향은 여기 속초다. 10여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유독 낯설지 않았던 곳이 속초다. 어릴 적부터 조부모님을 통해 속초의 지형과 삶에 대해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고향 속초에서 설날을 보내며, 나는 평양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평양에서 설날은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이는 1년 중 몇 안 되는 날이었다. 12월 31일이 되면 20여 명의 친척이 조부모님 댁에 모여 설 음식들을 준비하였다. 다 함께 송편과 만두를 빚고, 전을 부치고, 두부를 직접 만들고, 때로는 순대도 만들었다. 할머님께서는 전 가족이 모이기로 하면 한 달 전부터 콩나물을 정성 들여 키우셨다.

조부모님 댁은 대중교통이 없는 평양의 농촌지역이었고, 버스 종점에서 40분은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남한에서는 평양은 지하철도 있고, 버스도 다니는 곳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평양 외곽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 당시 나에게는 버스 종점에서 친척들을 기다렸다가, 짐을 들어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김일성 광장의 인민대학습당 ⓒ이형구

고등학생 때부터는 가끔 친구들과 함께 신년 종소리를 들으러 가기도 하였다. 1월 1일 0시, 서울에서는 종각에서 타종행사가 열리지만, 평양에서는 타종하지 않고 대신 김일성광장에 있는 인민대학습당 시계에서 종이 울린다. 31일 자정이 가까워지면 광장은 평양의 수많은 청소년들로 꽉 찬다. 그리고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환호성과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새해를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주고받는다. 주위의 많은 젊음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한껏 들뜨던 시절이었다. 광장에서 집까지 걸어서 2시간 걸렸지만, 추위조차 느끼지 못하고 새해에 뭘 할지 친구들과 토닥거리며 걷던 그때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다.

나의 고등학생 시절은 ‘고난의 행군’으로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다. 쌀이 없어 푹 삶은 옥수수를 먹고, 그것도 없으면 벼 뿌리 국수, 도토리묵 등으로 끼니를 연명하던 때였다. 그때 먹던 도토리묵은 한국의 흔한 도토리묵이 아니다. 도토리를 갈아서 설탕과 함께 빚는 방식으로, 물 없이는 넘기기도 어려웠고, 먹고 난 후에는 입안과 입술이 온통 분홍색으로 변한다.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춰 30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은 일상이었고, 외벽이었던 내 방은 1~2월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 물그릇에 살얼음이 생겼다. 추운 방에서 점퍼를 입고 입김으로 손을 녹여가며 석유 등불 아래서 공부하다 보면 아침에는 코 안에 새까맣게 그을음이 껴 잘 씻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새해는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설날은 지난해의 모든 어려움이 지워주는 마법 같은 날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설날조차 특별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긍정의 마인드를 심어주신 부모님과 가족애가 넘치는 가풍 덕분에 춥고 굶주리던 시기에도 희망이 가득한 설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일 년 중 설날을 제외하고 가족이 모이는 날은 대체로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방학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광복절에는 대부분 야외로 소풍을 갔다. 때로는 만경대유희장에, 때로는 모란봉으로 놀러 갔다. 소풍을 갈 때면 각 가정에서 음식을 가져오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어머님은 항상 숙부님이나 고모님보다 몇 배의 음식을 마련하셨다. 집안의 맏며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가끔은 외식도 했었는데 마지막 외식은 옥류관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남한에서 유명한 평양냉면(물냉면)이 아닌 쟁반국수를 선택했다. 쟁반국수는 쟁반에 미리 담긴 면에 육수를 부어 먹는 방식이다. 옥류관 밖에는 사람들이 식당 오픈을 기다렸지만, 우리 가족은 종업원들이 서빙 준비를 마침과 동시에 제일 먼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시장화가 본격화되어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되고 있었다. 옥류관조차 달러로 결제하면 기다림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한 그릇에 5$ 이내였다. 남한에 와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옥류관의 냉면과 서울의 평양냉면 맛이 다른지에 대해서다. 그때마다 나는 맛이 다른 건 확실하나, 어디 냉면이 더 맛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고 답해주곤 한다.

옥류관 쟁반국수 ⓒ이형구

옥류관 외부와 내부 ⓒ이형구

‘고난의 행군’ 시기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고, 이후 우리 집은 큰집이 되어 다른 형제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했다. 어머님은 우리 집 식량이 부족해도 시동생, 시누이들이 굶지 않게 나눠주셨고,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셨다. 다행히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후로 우리 집도 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이때부터는 모두가 우리 집에 모여 함께 명절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버님은 노래를 참 좋아하셨다. 2000년 초 나는 아버님을 위해 TV와 노래방 기계, 그리고 당시 북한에서는 보기 힘든 한국 LG사의 5.1 서라운드도 사드렸다. LG제품을 평양으로 가지고 갈 때는 LG로고를 모두 제거하여 세관을 통과했다. 아버님은 추가로 DVD 플레이어와 노래방 DVD 전부를 구매하실 정도로 노래에 진심이셨다. 점심부터 시작된 파티는 음식과 노래와 함께 밤늦게까지 이어졌는데, 사촌동생들까지 워낙 노래 부를 사람이 많았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가슴이 아파진다.

노래방 기계로 노래부르는 가족들 ⓒ이형구

할아버님께서는 가족들이 모이면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향 속초가 너무 그립다. 고향 가면 영랑호와 바닷가 사이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그러시면서 자신뿐 아니라 맏아들인 우리 아버님도 고향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탄하셨다. 그렇지만 집안의 장손인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할아버님은 고향과 고향에 남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주셨다. 할아버님의 소원이 하늘에 닿아 지금 나는 여기 한국에 와있고,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고향을 원할 때마다 찾고 있는 것 같다.

10여 년 전 외국에서 생활하던 나는 한국행을 결심하면서 주변의 감시로 떠나도 되는지 여부를 부모님께 여쭤볼 방법이 없었다.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부모님께 새집을 사드리고, 수중에 있던 적지 않은 현금을 모두 보내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제 의도를 알아차리신 듯 이런 문구를 넣어 회답을 해주셨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만 바랄 뿐이다. 부모 걱정은 하지 마라”. 지금도 가끔 어머님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어머님의 이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여기에 있었을까 자문하곤 한다.

이번 설에는 친척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시고, 불효자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잠시나마 잊으시길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