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사고의 전통을 잇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조선(朝鮮)은 '기록의 나라'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우리 선조(先祖)들은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국가의 주요 행사들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묘사하는 등 국가 운영 전반에 관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500년에 걸친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관리도 철저했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戰亂)을 거친 와중에도 최대 규모 역사서를 보유할 수 있었지요. 다만, 일제강점기에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일본으로 반출됐는데요, 이를 110년 만에 환수했다고 합니다. 선조들이 남긴 역사를 잃지 않겠다는 후손들의 마음 덕분에 미래 세대에게 전할 수 있게 된 유산들, 에디터가 따라가 보았습니다.

월정사 경내지에 위치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총면적 3537㎡, 지상2층 규모이며 2023년 11월 12일 개관했다. 현재 1부 '깊은 산속에 품은 조선왕조의 역사, 오대산사고', 2부 '조선왕조실록, 역사를 지키다', 3부 '조선왕조의궤, 왕조의 모범을 보이다'로 구성한 상설전시를 통해 유물 70여점을 전시 중이다.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76
* 관람시간 : 11~4월 09:30~16:50 / 5~10월 09:30~17:30
* 휴관일 : 매주 화요일 휴무(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휴관)
* 관람료 : 무료

조선왕조실록, 역사를 지키다 

조선 전기에는 궐내의 춘추관 사고 외에도 비교적 접근이 쉬운 충주, 성주, 전주에 외사고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사고와 세 곳의 외사고가 피해를 입자 전후에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에 오대산사고, 정족산사고, 태백산사고, 적상산사고 등 네 곳에 외사고를 설치하였다. 이 중 오대산사고는 강원도 오대산에 있었던 조선왕조의 서고이다. 

외사고의 역사를 담은 영상물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 실록의 이동 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오대산사고를 지키는 인력은 강원도에서 선발했다고 합니다. 참봉은 건물 관리의 실무자로, 강릉의 유생들 중 2명을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했습니다. 건물 수호는 강원도 승려들이 담당했고, 월정사의 주지가 총섭을 맡았습니다.

조정에서는 정기적으로 사관을 파견해 서적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이렇듯 조선왕조가 외사고를 엄격하게 관리하였기에 오대산사고의 서적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이관될 때까지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에 품은 조선왕조의 역사,
오대산 사고

성종실록을 담았던 실록상자. 상자 윗면에는 임금의 묘호를, 옆면에는 상자를 봉인한 사람의 이름과 실록의 내역을 붙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472년(1392~1863)의 역사를 담은 기록입니다. 두 번째 전시관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을 오대산사고본 <성종실록>, <중종실록>, <선조실록>, <효종실록>과 함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1913년에 동경제국대학으로 모두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그 일부가 남아 1932년 27책과 2006년 47책, 2017년 1책 등 세 차례에 걸쳐 총 75책이 돌아왔습니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동경제국대학교, 경성제국대학교 인장이 찍혀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성종실록> 9책과 <중종실록> 50책은 다른 사고본 실록과 달리 교정을 보았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 실록은 몇 차례 원고를 인쇄해 교정을 본 후 새롭게 인쇄해 정본을 만들고 교정쇄본은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기준으로 실록을 다시 편찬하는 과정에서 물자가 부족한 전후 사정으로 교정쇄본을 남겨 오대산사고에 봉안했다고 합니다.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던 중종실록 교정쇄본(左)과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었던 정본 중종실록(右)을 통해 실록편찬의 중간과정과 교정부호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성종실록>에는 성종의 군주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동물 애호가로서의 면모까지 다양한 모습이 기록되어있으며 <중종실록>에는 중종의 딸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 드라마로 알려진 장금에 관한 기록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중종실록> 35권에 실려있습니다. 1519년(중종14) 4월 2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신하들이 여성을 사관으로 임명하자고 건의한 내용인데요, 과연 조선에는 여성 사관이 있었을까요?

<중종실록>에 기록된 여성 사관 임명 관련 내용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실록에 따르면 동지사(종2품) 김안국은 중국에도 여성 사관이 있었고, 후대의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더욱 잘 판별할 수 있도록 임금의 사적 공간에서의 일까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중종은 “글에 능한 여성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김안국은 “문자를 조금이나마 해독할 수 있다면 충분히 글을 기록할 수 있다”며 왕을 설득했습니다.

다른 신하들도 김안국의 말에 동의를 했지만, 중종은 대꾸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고 하네요, 조선은 사관 제도를 통해 열린 정치를 표방하고, 부적절한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방지하고자 노력했지만 중종은 사적 공간에까지 사관을 두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것 같습니다. 결국 여성 사관 제도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의궤,
왕조의 모범을 보이다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시대에는 왕실 행사의 절차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행사를 진행할 때 참고하도록 의궤를 제작했습니다. 의궤는 출생, 책봉, 즉위, 혼례, 장례, 잔치, 사신 영접, 기록물 편찬, 어진 제작, 건축 등 다양한 행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궤는 보통 5~8부를 만들어 1부를 임금에게 진상하였고, 나머지는 의례를 주관하는 관청에 두거나 사고에 옮겨 보관했습니다. 의궤는 글로 이해하기 어려운 의례와 공사의 세부사항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고 글을 덧붙였습니다. 의궤에는 행사에 관한 왕과 신하들의 논의사항, 관청 간에 주고받은 문서, 담당자 명단과 사용된 물품, 경비 내역, 포상 내역 등 행사의 생생한 현장이 담겨 있습니다

신정왕후 팔순을 기념해 1887년에 열린 왕실 연회과정을 기록한 의궤(上)와 연화대무가 새겨진 의궤 도설판(下左), 학무가 새겨진 의궤 도설판(下右)

시행될 행사가 정해지면 이를 준비하기 위해 임시기구인 도감이 설치되었습니다. 도감에서는 행사의 전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문서들을 수집했고, 도감 아래 실무부서를 두어 각 부서별로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실무 부서에서 모은 문서들을 토대로 의궤청에서 의궤를 편찬했습니다. 의궤에는 참여자들의 행렬 모습을 그린 반차도와 행사에 사용되는 각종 물건의 그림인 도설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왕실의 생활상을 고증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남북으로 나뉜
조선왕조실록 四大史庫

현재 조선왕조실록 사대사고는 남북한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남한은 정족산본(서울대 규장각), 오대산본(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태백산본(국가기록원)을, 북한은 적상산본(김일성종합대학)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실록은 1633년 북한 묘향산사고가 보관 중이던 실록입니다. 전라도 적상산 사고를 거쳐 일제시대 서울장서각에 보관돼오다 김일성 주석이 6·25때 북한으로 가져간 것이라고 합니다.

사대사고본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적상산본을 제외한 태백산본, 정족산본, 오대산본만이 국보 제151호(1973년)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1997년)으로 등록되어있는데요, 사대사고의 현실이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 아픕니다. 2013년, 실록 편찬 600주년을 기념해 남북한이 소장한 조선왕조실록 사대사고본을 한 자리에 공동 전시하는 사업이 정부 차원에서 검토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후손들의 노력 끝에 오대산본이 110여 년만에 돌아온 것처럼, 언젠가 사대사고본을 한 자리에서 볼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