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청진

지난 평양 편에 이어 두 번째로 연재되는 나의 살던 고향은 바로 청진입니다. 북한이탈주민이자 협회 경제전문 자문위원 중 한 분의 고향인 청진의 기억 속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시나요? 웹진 <이음>의 성격에 맞게 청진에서는 그 시절 어떤 경제활동이 있었는지도 공유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요. 웹진에서나마 독자님들과 함께 그 시절 청진으로 떠나보면 좋겠습니다~(기고자의 이름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별명이나 가명으로 게재하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청진시 전경 (출처:flickr)

나의 살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이다.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의 도소재지이며 동해바다와 접해있는 아름다운 땅이다. 미국 시카고와 비슷한 위도대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양성기후로 인해 겨울에는 그다지 춥지 않고 대신 여름에는 시원한 것이 특징인 도시이다. 도시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수성천과 그 주위로 넓게 펼쳐진 평야, 이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과 도시의 한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동해바다까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청진시는 일제 때부터 공업도시로 개발되어 한반도 5대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현재도 청진시는 인구로는 북한의 제2, 제3의 도시로 통한다. 무산광산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부터 철강산업이 발전하였으며 북한의 가장 큰 연합기업소 중 하나인 김책제철연합기업소가 있다. 청진제강소, 청진조선소, 청진버스공장 등 금속가공산업도 발달하였다. 또 청진석유화학공장 등의 대형공장이 많아 함경남도의 함흥과 함께 북한의 손꼽히는 중화학공업 중심지로 불리기도 한다.

청진시에 위치한 철강공장 (출처:flickr)

대화를 나누고 있는 청진시 여인들 (출처:flickr)

서해의 남포항과 더불어 동해 주요 항구인 청진항은 북한의 2대 항만이다. 일본, 중국,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어 무역선의 기항지 역할을 했고 선원구락부와 외화상점 등도 발달했다. 강원도 원산과 함께 북송 재일교포가 많아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들을 통해 들어온 일본제 의류와 생필품이 은밀히 거래되기도 했다. 이런 영향은 평양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청진이 북한 내 패션유행을 선도했다고 알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95년 중반부터였을까?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학생들의 결석도 잦아졌다. 초기에는 학생이 출석을 안하면 가정방문을 하도록 하였다. 소년단 간부였던 나는 결석한 학생의 집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 부모님은 먹을 것을 구하러 출타하셨고 내 친구와 동생은 며칠을 굶었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삐쩍 마른 몸으로 우릴 맞이했다. 부엌 가마는 언제 음식을 만들어먹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고난의 행군' 본격화와 함께 수남장마당(시장)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시멘트벽돌로 만들어진 장마당 안뿐 아니라 그 밖으로도 수없는 장사 행렬이 끊임없이 늘어섰다. 상품이라고도 볼 수 없는 생필품부터 입던 속옷, 밥가마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배수로도 없는 골목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물 등을 아무렇게나 버리는 바람에 시장 바닥은 비가 오지 않아도 항상 흙탕물 투성이었다. 그 가운데 음식을 훔쳐먹는 '꽃제비'들이 넘쳐났다. 당시 '꽃제비'들의 절도가 빈번하자 수남구역 사로청(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은 규찰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청진시의 신축아파트로 추정되는 건물 전경 (출처:flickr)

북한의 꽃제비 (출처:flickr)

나도 규찰대의 일원으로 완장을 차고 장마당 통제를 했다. 그 과정에서 음식을 훔친 꽃제비가 잡혀서 주먹과 발로 온몸을 마구 맞으면서도 훔친 음식을 입안으로 우걱우걱 밀어넣는 모습을 보았다. 가끔 그 친구와 마주쳤던 그 눈빛이 떠오른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슬픈 기억이다.

수남시장의 확대는 외화벌이사업소의 확산과도 관련이 깊다. 바다를 끼고 있고, 충분한 인구가 있으며, 일본 무역선이 들어오고, 중국과 러시아와 인접한 청진은 외화벌이 사업을 하기에는 최적의 위치였다. 외화벌이사업소가 수산물, 송이버섯 등을 일본, 중국 등에 팔고 받아오는 중국산 밀가루, 쌀, 생필품은 시장에서 다시 소화됐다. 시장 상인들은 외화벌이 사업소에서 받은 중국산 상품들을 시장에서 팔고 차익을 남기면서 점점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외화벌이 사업을 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당시 청진사람들은 외화벌이를 조롱하는 말도 심심치 않게 하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내화벌이', '교화벌이', '부화벌이'였다. 내화벌이는 외화를 번다고 하지만 돈도 제대로 못 버는 것을 빗대어 하는 얘기였고, '교화벌이'는 불법을 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까딱 잘못하면 당국에 구속되는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부화벌이'는 돈을 번다고 남녀가 함께 다니며 불륜 등을 일삼는 것을 조롱하는 의미이다.

아버지가 외화벌이 사업에 발을 담그고 계시다 보니 나는 그쪽 사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식당이 따로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아버지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마셨고 그 술자리에서 오가는 얘기는 학교 정규과정이나 내 나이 대에서는 쉽게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어느 날 대화중에는 외화벌이를 통해 돈을 크게 번 누가 여자를 끼고 황색비디오를 보다가 잡혀갔다는 얘기도 있었고, 누군가는 돈을 빌려 사업하다가 사기를 당해 가족들과 도망갔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쨌든 청진은 외화벌이와 장마당의 확산 효과로 타 지역보다는 '고난의 행군'시기를 조금 빨리 헤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1998년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함흥과 단천, 원산을 거쳐 평양까지 갈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지역들은 청진보다 더 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함흥지역의 장마당에서는 시체 옆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단천에서는 다 해진 옷을 입고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좀비같은 사람들과 맞닥뜨리기도 하였다. '혁명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평양에서 꽃제비들이 김일성광장을 배회하고, 난방도 안 되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아파트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발전기를 돌리고 히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라가 진짜 망했구나 실감하기도 하였다. 17살의 나에게 그 모습은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평양보다 청진이 살기에는 더 낫다는 강한 편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청진시의 아이들 (출처:flickr)

이제 북한을 떠나온 지도 어언 25년이 넘었다. 현재 나는 북한 관련 업무를 하면서 그 당시의 북한과 현재의 북한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실감하고 있다. 북한을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깨닫고 느끼는 것은 이제 북한은 더 이상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은 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 배급에 의존하며 생과 사를 국가에 의존하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직무유기와 방치를 이겨내고 새로운 북한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간다. 유년시절 뛰어놀았던 수성천과 신암해수욕장, 청년공원의 오리배가 마치 꿈에서 본 희미한 기억같이 되어버렸다. 언제면 다시 그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오늘도 그 땅을 위해 기도하고, 일한다. 언젠가 다시 나의 고향이 기억 속의 희미한 추억이 아닌 실제 밟고, 느끼고, 생활할 수 있는 땅이 되길 바란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잘 견뎌주길, 세상에 다른 사회도 있다는 것을 꼭 경험하길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