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과학원 (출처: 플리커)

북한의 도시들은 나름대로 명칭이 있다. 수도 평양, 항구도시 남포, 철의 도시 청진, 화학 공업도시 함흥, 국경도시 신의주 등처럼 말이다. 내가 살던 평성은 과학·교육 도시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 평안남도 순천 사인면, 후탄리, 평양의 순안과 용성의 일부였던 지역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국가과학원 본원 중요 연구소의 위치가 평성이고, 석탄대학, 수의축산대학, 이과대학 등 중앙대학과 의대, 경공업 대학, 사범대학 등 각종 교육기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김일성이 평안남도 당, 행정기관을 평양에서 쫓아내면서 그에 따른 불만을 해소하고 주민을 기만하기 위해 과학·교육 도시라는 타이틀을 달아 준 것 같다.

평성 시내(출처: 플리커)

평성이라는 도시명도 체제 유지와 안위를 위해 '평양을 보위하는 성새'가 되라는 의미에서 평양의 '평' 자와 성새의 '성' 자를 따서 평성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평성은 북한에서 평양이나 함흥, 신의주처럼 유명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 평성이 유명해진 것은 1990년대 경제난, 북한식으로 소위 '고난의 행군' 이후 장마당이 생기고 평성 장마당이 전국에 이름나 도매 상품과 돈주가 많고 '고양이 뿔'도 있다는 평성시장의 존재가 알려지면서부터이다.

평성 피복공장(출처: 플리커)

내가 성장하던 시기 평성은 어디 가서 "나 평성에서 살아" 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도당과 도인민위원회가 있고, 과학원이 있어 평안남도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인 것과, 당시만 해도 인기가 있었던, '모란봉 시계'와 '평성 고무줄'이 유명했던 정도이다.

내가 학교 다니던 1970년대 중덕고등중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이 국가과학원 가족이었고, 도당, 도인민위원회, 도안전국, 도보위부 등 도급기관 가족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시급기관이나, 지방공장 가족들은 명함도 못 내밀었다. 특히 과학원 가족이 많았는데 그들의 출생지가 전국인 탓에 사투리가 범람하면서 교원들이 평양 표준말을 쓰라고 강요했다. 특히 양강도, 함경도, 개성 출신들이 놀림을 많이 받았고, 심지어 생활총화에서도 표준말 잘 못한다고 비판하던 기억도 있다.

나의 어린 시절 평성은 모든 것이 부족한 도시였다. 국가에서 주는 배급이 없으면 어디 가서 채소나 과일, 고기를 구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들이 자전거를 타고 농촌에 나가 콩이라도 얻어와 두부를 앗거나 콩나물 반찬을 해 먹는 날이 '명절'이었다.

언젠가는 아버지 생일을 준비한다며 엄마와 함께 평원까지 왕복 120리를 걸어가 집에 있던, 바지 멜빵 고무줄과 평성 완구공장에서 만든 장난감을 주고 닭 1마리와 계란 몇 개를 교환해 오면서 힘든 줄 모르고 좋아한 적도 있다.

평성 주민들(출처: 플리커)

평성은 도시 주민수요를 자체 생산으로 충족하지 못하는 소비형 도시경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평성에서 제조업에 비해 서비스업만 발달하였고 대부분의 노동인구는 교육, 과학연구 서비스업에 집중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장이 형성되기 전까지 평성은 속이 텅 빈 "나이론 도시*"이었다.

1990년대 경제난은 꿈속에서도 굶어 죽을 것만 같은 아픈 기억이다. 시작은 1980년대 중반부터라고 생각된다. 배급과 국가공급이 점점 줄어들면서 1990년대 초 완전히 중단되었다. 당시 먹을 것을 구하려고 내가 차던 일본산 세이코 시계와 아끼면서 입던 아디다스 체육복을 가지고 농촌에 나가 강냉이와 콩으로 바꾸어 죽을 쒀서 아침상을 차리며 미안해하던 집사람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것도 없는 집은 그냥 굶었다. 당시 많은 주민이 "공산주의가 언제 오나 했더니 벌써 지났다."라고 하면서 하루 종일 줄을 서 배급받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러던 중 평성은 매일 장(場)이 생기고 장마당에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소비형 도시의 특성에 맞게 식품 가공이 먼저 발달하였다. 당시 "평성 빵"으로 전국에 소문난 계란빵이 있었고, 과학원 가족들이 만든 수제 맥주, 인조고기 밥도 도시주민들을 살린 효자 품목이었다.

시장화에 따른 평성의 변화는 첫째로 비공식 시장의 형성이었다. 1990년대 초부터 진행된 경제난은 공식부문에서 거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일자리가 있다고 하여도 공장, 기업이 생산하지 못하여 거의 소득이 없었고, 설혹 생산한다고 하여도 낮은 임금으로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시장에 의존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배급은 중단 되어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이고, 배는 고프고 국가기업의 대부분 일은 임금이 너무 싸서 한 달 월급으로 쌀 1kg을 사기 힘들었다. 많은 여성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족을 위하여 역전 길거리에 앉아 여행자들을 상대로 더울 때는 얼음물,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옥수수차를 만들어 팔았다. (옥수수차는 물 10에 닦은 옥수수 한 줌 넣고 만들었다.) 가끔 술도 팔았다. 주변의 모든 여성이 다 생존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힘들고 창피해도 나와 앉았다. 배급중단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식량과 생활비를 벌어오지 못하는 남편들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어깨가 축 처져져 다녔다. 아내와 아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계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남자들과 일부 건강한 여성들은 각종 손수레를 이용하여 짐을 운반하고 아이들은 길에서 담배를 팔고 구두를 닦으며 차를 닦고 폐품을 모아서 팔았다. 거기서도 우두머리는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쓰레기를 수집하기 위해 쓰레기장을 독점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어린 소년들을 고용하고 노점상들은 가장 좋은 터를 위해 머리칼 잡기를 매일 같이했다. 이도 저도 없는 농촌 여성들은 도시로 올라와 자기의 꽃 같은 젊음을 팔았다.

평성 변화의 두 번째 특징은 시장의 공식화이다. 종합시장의 공식화는 평성을 전국의 도매시장으로 돈이 많은 도시로 소문나게 했다. 평성에서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주민의 저축 가운데 국가에 의한 공급의 비중이 줄고 시장에서의 경제활동 이윤이 이를 대체함으로써, 도시와 사람들이 다소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당시 평성 사람들은 시장에 역할에 대하여 "배급이 없어도 종합시장이 생기니 내가 벌어 이밥 먹어서 좋고, 수돗물이 안 나와도 샘물 먹어서 좋고 상점에 상품이 없어도 내가 입을 옷과 내가 신을 신발 내가 만들어서 좋다"라고 표현하였다. 평성의 신발 제조, 의류가공, 평성 빵, 수제 맥주는 시장화를 향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개인의 자율적 중소제조업을 형성한 대표적 사례다.

평성의 한 매대(출처: 플리커)

평성시장에서 제일 대표적인 수공업 제품은 신발, 의류, 수제 맥주, 빵, 술, 두부, 변압기, 경대, 가구, 화장품, 샴푸, 비누, 그리고 과학지구의 빙두, 모르핀, 효소, 각종 약품 등이다. 여기서도 주례동의 수제 인조가죽 구두, 평성 가공 옷, 수제 맥주는 인기가 독점적이고 일부 중국 수입 제품보다 좋다는 평가를 받아 수요가 많았다.

현재 북한 사회는 집단주의와 시장의 물질주의가 서로 밀어내거나 협력하면서 공존하고 있다. 내가 살던 평성만 보아도 노동당 권력에 종사하는 일부 계층을 제외한 일반 주민들 속에서는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면서 충성심이나 직업보다 소유의 정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물질적인 보장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북한 주민이라고 해도 생명권 보장을 위한 물질적인 욕구는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경우 도시도 사람도 변화를 통한 발전을 추구해야 하며 그러한 변화는 생활수준의 향상, 즉 물질적 소비의 증대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