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편

남포

협회 경제전문가자문단 위원들의 고향 소개 릴레이가 벌써 5편째에 접어들었네요. 이번 호는 북한 제 2의 도시 '남포'입니다. 화려한 남포항과 외부의 문물들, 그리고 그 이면에 모여드는 꽃제비의 현실까지 북한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남포의 기억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기고자의 이름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기재하지 않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남포항의 상징, 서해갑문(출처: 플리커)

남포항에 정박한 선박 모습(출처: 플리커)

북한 제일의 항구 도시

 평양에서 쭉 뻗은 ‘청년영웅고속도로’를 타고 서해 쪽으로 달리다 보면 평양 다음가는 제2의 도시 남포시가 자리 잡고 있다. 남포는 평양과 근거리에 있어 수도 소식과 패션이 가장 먼저 유입되고 북한 제일의 무역항인 남포항과 대규모의 남포 제련소, 조선소, 령남배수리공장이 있어 시민들은 타 도시에 비해 비교적 잘 산다. 거기에 서해를 끼고 있으니, 동해에서 생산할 수 없는 소금도 많이 나고 까나리, 꽃게, 조개도 많다. 남포에서 곡창지대인 황해남도로 연결되는 서해갑문이 있어 식량 유통도 순조로워 먹고사는데 유리한 지역이다.

 사실 나는 남포 태생은 아니다. 그러나 불타는 청춘 시절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뗀 곳이자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두 아들을 낳은 잊을 수 없는 고향이다.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남포는 웅장했고 황홀했다.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수천~수만 톤급 무역 배, 무역 배에서 수입품을 하역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크레인, 하역한 물건을 실어 나르는 트레일러, 물건을 운송하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선 자동차들, 야적장에 넘쳐나는 수출·수입품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한 물건-바퀴 달린 가방(캐리어)을 끌고 항구 내를 걷고 있는 무역 배 선원들…. 밤이면 가로등도 주택가도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데 무역 배가 정박한 부두는 늘 밝게 불을 비추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딴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남포의 시내 거리 전경(출처: 플리커)

'고난의 행군'시기 꽃제비의 안식처

 그러던 어느 해, 부모 잃고 방랑하는 아이들(꽃제비)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꽃제비들은 몰래 남포항 구내에 들어가 식량, 설탕, 과일을 훔쳐 배고픔을 달래고 시장에 물건을 팔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수많은 꽃제비가 굶어 죽어가는 속에서 항구 도시의 이점을 어찌 알았는지 남포를 찾아온 아이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야적장에 쌓아둔 수입품을 훔친 4명이 아이들이 남포항 경비대에 붙잡혔다. 얼굴은 언제 씻었는지 얼룩덜룩했고 입은 옷은 눈비에 젖고 땀에 찌들었다. 경비대원은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해 그냥 돌려보내려고 하니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단 한분 한분밖에 없습니다.
믿고 살 우리의 어버이 한 분밖에 없습니다."

 노래를 듣던 경비대원도 아이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탁아소 때부터 매일과 같이 칭송하던 어버이가 아이들에게 준 것이 배고픔과 죽음인데 이 아이들은 왜 이런 가사의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시장에서 상인들의 물건을 몰래 훔치다 잡히면 불쌍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대신 수령을 칭송하는 노래로 어른들의 마음을 사려했다고 한다.

남포항에 모여든 사람들(출처: 플리커)

전국 시장가격을 쥐락펴락하는
수입식품의 공급지

 북한 시장의 설탕, 식용유, 식량 가격은 남포항에 입항하는 무역 배의 규모와 시기에 따라 오르내린다. 남포항의 총사령실을 통해 “남포항에 설탕이 들어온대. 이번에는 1만 톤짜리 배야. 1주일 후에 정박한대”라고 소문나면 바로 남포시장의 설탕 가격이 내리고 뒤이어 전국의 설탕 가격이 동시에 하락한다. 반대로 달러 가격은 오른다. 남포시의 차 판 장사꾼들이 설탕 구매 대금을 사전에 준비하려고 사금융 시장을 이용하면서 갑자기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식용유 가격도 마찬가지다. 무역 배가 정박하는 날 장사꾼들은 5톤 트럭 여러 대씩 끌고 와 식용유를 싣고 함흥·원산·사리원 등 전국의 대도시로 이동한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차 판 장사꾼 같은 통 큰 장사를 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능력이 좋은 장사꾼들은 몇 해 만에 ‘돈 주’가 되었고 지금은 하루에 수십 달러씩 소비하는 부자가 되었다.

장사라곤 전혀 경험이 없는 나는 회사 선배님과 함께했다. 남포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저렴한 가격에 사서 5톤 트럭에 실어 감자 생산지인 함경남도 장진군으로 가져가고 대신 감자를 사서 남포시장에 팔아 시세차익을 남기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수입은 꽤 괜찮았지만, 직장인이라 시간 내기가 어려워 지속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 그것이 직장 선배의 큰 딸이었다. 그녀는 시집가면서 퇴사했고 돈을 맡겨도 절대 믿을 수 있었다. 그녀도 차 판 장사 덕에 큰돈을 벌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 그리고 지금도 남포시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조건과 환경이 좋은 지역이다. 

평화자동차종합공장 전경(출처: 플리커)

남북 첫 합영기업

 남포 사람들의 생활이 다른 지역보다 나은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투자하여 설립한 합영기업 때문이다. 남포에는 1995년 한국의 대우그룹과 북한 삼천리총회사가 50:50으로 총 1,050만 달러를 투자해 설립한 ‘민족산업 총회사’가 있다. 1996년에 가동되었으나 1999년 대우그룹의 자금유동성 악화로 2000년에 합영 사업이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 설립한 기업에 비해 생산공정이 현대화·자동화되어 있어 북한은 현재까지도 해외에서 원단을 수입하여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합영기업으로 운영될 때는 남포의 그 어느 기업보다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기업으로 유명했고, 이후에도 생산은 지속되고 있어 남포항 다음으로 선호하는 기업이다.

 2002년 4월에는 남북이 합영한 평화자동차공장이 가동되었고 그해 8월 첫 제품인 ‘휘파람’이 출시되었다. ‘휘파람’, ‘뻐꾸기(SUV)’, ‘준마’(승용), ‘삼천리’(승합) 등 7개의 차종을 생산한다. 평화자동차공장도 민족산업 총회사처럼 남포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공장이다. 비록 지금은 남쪽 사람들은 모두 철수하고 북한에 넘겨진 기업이지만, 남포는 남북 최초의 합영기업이 설립된 의미 있는 도시이다.

 지금은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공식화로 남북 간 협력사업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언젠가 남북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합영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류 협력사업이 재개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