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편
단 천
협회 경제전문가자문단 위원들의 고향 소개 릴레이 '나의 살던 고향은' 시리즈가 어느덧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단조로운 북한 정보와 달리 감성적인 글이라 인기가 많았던 웹진의 대표 콘텐츠였는데 아쉬움이 크네요. 앵콜이 들어온다면 시즌2를 기획해보겠습니다. 이번 호는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의 모태가 된 남북 당국간 경공업 및 지하자원개발 협력사업의 바로 그 지역, 함경남도 '단천'으로 찾아가 봅니다.
*기고자의 이름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기재하지 않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단천 시내>
90년대 이전 단천은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바다를 끼고 있는 광업도시로 농사도 비교적 잘 되고 과수업도 발달되어 사과, 배, 복숭아 등 과일이 풍부했다. 70년대 태어나 학창시절이 끝나던 80년대 말까지 단천은 수산물, 과일, 농산물이 풍부한 지방으로 꽤 잘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다자원이 풍부한 단천은 성게와 미역이 유명하다. 동해안지역에서 성게와 미역의 맛이 좋아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도루묵어, 이면수, 가재미, 청어 등 다양한 어종의 수산물이 풍부했었다.
80년대, 공장 및 기업소에서 공급하는 겨울명태를 다층주택 베란다에 걸어 놓으면 바람에 날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동네 강아지가 명태를 물고 있어도 쫓아가지 않았던 시절이다. 인민학교시절 오전수업이 끝나고 점심 먹으려 집으로 가는 중 농민시장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황태를 간식으로 사먹고 다녔다. 1마리 50전하는 큰 황태를 학급 친구 2~3명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단천에는 다양한 종류의 과일이 생산된다. 사과, 배가 맛이 좋다고 잘 알려져 있다. 90년대 이전에는 남새과일 상점에서 판매하기도 하였다. 80년대 후반까지도 단천에는 시내 주변 가까운 야산은 거의 사과와 배, 복숭아, 자두(추리)등 과수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80년대 중반부터 단천광업건설연합기업소. 단천광업총국 등 특급기업소가 생기자 시내 주변 과수밭이 주택단지로 변했다. 군에서 집단제대되어 온 군인출신 근로자들이 갑자기 늘어나자 과수밭을 갈아엎고 기업소별로 주택을 건설하였다.
나의 고향 단천은 광업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광물자원은 원유 빼고 다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용한 광물자원들을 품고 있다. 단천에는 금, 은, 동, 철, 연, 아연 마그네사이트, 인회석, 석회석, 흑연, 옥, 활석 등 다양한 광물이 묻혀 있다. 특히 검덕의 연, 아연, 용양, 대흥의 마그네사이트는 세계적 수준의 매장량을 품고 있으며 북한의 중요한 수출품종이다.
<기업소 주택단지>
<로은광산 입구>
<검덕광산 내부>
<대흥청년영웅광산 사별장>
학창시절 검덕광산에 지원물자 전달로 처음 갔을 때 그 좁은 검덕골 안에 몇만 명의 근로자들이 오가고, 주택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특히 밤에 금골역 위에 있는 주택들이 급경사로 인해 고층아파트인 것처럼 보여 또 한번 놀라기도 했다.
산과 바다가 품고 있는 자원은 풍부했으나 정작 거기 사는 주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80년대 초반까지는 무엇이든 다 있고 풍부하기로 소문났던 단천은 특급기업소들이 연이어 들어선 80년대 후반부터 모든 것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북한에서도 가장 못 사는 지역 중 하나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한편 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배급소가 문을 닫자 장마당이 여기 저기 들어서고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한 생존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장마당에는 중국산 공산품이 매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지역 생산품은 수산물과 농산물만 있었다.
96년 초 겨울 어느 날 방한양말을 구매하려 장마당을 찾았다. 의류잡화 장사꾼에게 비싸도 좋으니 질 좋은 양말을 부탁했더니 귀속말로 ‘아랫동네 것이 있는데’라며 주변 눈치를 보며 살짝 말했다. 아랫동네가 무슨 뜻인지 눈치를 채지 못하자 다시 조용히 ‘남조선 것인데 정말 좋다’고 설명했다.
<검덕용수펌프장>
<대흥청년영웅광산 노천채광장>
갑자기 남조선제품이라는 소리에 호기심과 두려움도 약간 있었으나 살짝 만져보자고 했더니 의류상품 맨 밑에서 꺼내 다른 상품과 섞어서 나에게 보여주며 만져보라고 했다. 북한산이나 중국산 양말과 달리 더 부드러운 것 같고 보기에도 특별해 보였다. 특히 양말이 꺽이는 부분에 신축성 있는 고무(밴드)처리 되어 있는 것은 처음 봤다.
가격은 당시에도 좀 높았던 것 같다. 한 짝에 130원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쌀이 1kg당 50원 할 때였다. 장마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장사꾼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남조선을 아랫동네라고 부르는 저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말을 듣거나 만들었을까? 확실히 장마당은 무엇이든 앞서가는 민심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아랫동네 양말을 처음으로 샀던 그 장마당이 지금 단천종합시장이 되어 파란지붕을 씌운 매대가 규모있게 서있는 모습을 구글위성 사진으로 가끔 보고 있다. 그리고 아랫동네 양말을 팔던 아주머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9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식량난 시작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 역시 식량난의 소용돌이에서 장마당을 통해 먹고 살았다.
<단천시내 위성사진>
<대흥역>
6년간의 사회생활에서 직장에 대한 추억보다 장마당과 관련된 추억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단천장마당, 두언장마당, 허천의 상농광산 장마당, 검덕광산 장마당, 용양광산 장마당, 광천장마당, 김책시 청학장마당, 한천장마당, 쌍룡장마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무척 궁금하다.
90년대 식량난은 비극적인 아픔도 있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간부들만 잘 먹고 잘 살는 세상이 아니라 장마당을 통해 돈을 벌어 장마당의 고급한 것들을 먹고 쓰는 장사꾼의 세상, 돈주의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한류열풍도 결국 장마당을 통해 더욱 확산되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통일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정권의 두 개 국가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의아해 하지만 그들이 포기한다고 통일이 안 될 수는 없다.
남북교류와 협력은 북한의 장마당인들이 더 원하는 민심의 뜻이어서 반드시 다시 시작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