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 제 1 편

강원도 고성(북한)

독자 여러분의 앵콜 요청으로 이음의 시그니처 콘텐츠가 된 '나의 살던 고향은'이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협회 경제전문가자문단 위원 외에 여러 북에서 오신 분들의 고향 이야기를 취재, 게시하려고 하는데요. 그 첫 번째는 바로 북강원도 고성입니다.(북한에도 남한처럼 강원도 그리고 고성이 있다는 사실, 아시죠?ㅎ) 과연 북한 고성은 남한 고성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떠나보겠습니다!!

*기고자의 이름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기재하지 않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내 고향 말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금강산이다. 북한에서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고성은 몰라도 금강산 하면 다 알았다. 고성은 금강산 덕에 휴양지로 유명하다. 외국인들은 물론 각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해마다 금강산을 찾는다. 그 덕에 나는 처음 보는 노랑머리 외국인도 봤고, 심지어 말도 해본다. 그래봤자 '헬로우'가 전부인 걸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쩌다 한국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고성 바다에서는 바위가 많아 수산물 서식지로 안성맞춤하다. 해삼, 전복, 문어, 이면수, 도루묵어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바다에서 문어 한 마리 잡을 때의 심정은 물고기 100kg을 잡는 것보다 몇배의 희열을 느낀다. 도루묵어 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밤에도 잠을 안자고 일을 한다. 마치 명절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기는 항상 기분이 좋았다. 나도 그 시기 밤마다 친구들과 뛰어 놀았다.

고성에는 많은 과일이 생산되지만 제일 유명한 과일은 감이다. 감철이 되면 이집저집에서 어린 친구들을 찾는다. 감을 따기 위해서는 어른보다 가볍고, 날랜 아이들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감을 따며 나무에서 홍시가 된 감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집집마다 곶감을 말리고 더러는 침을 담궈 먹었다.

2000년대 한국에서 금강산 관광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한국의 정체성이 많이 알려졌다. 그러면서 한국의 물품들을 쓰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이후 한국 관광이 끝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물품을 느낄 줄도 사용할 줄도 잘 못하면서 한국 것이면 비싼 명품백처럼 자랑했다. 친구들과 양치질을 할 때도 한국 글자가 있는 칫솔을 쓰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도 멋있어 보였다. 옷은 더 말할 것 없었다. 한국 옷이면 2배 이상 비쌌지만 친구들은 입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한국 화장품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북한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표 검열을 피하려고 상표를 지워 나온다. 장사꾼들은 중국화장품을 한국화장품으로 속여 비싸게 팔아먹었다. 그 정도로 그냥 모든 게 한국 것이면 좋다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다.

학창시절에 농촌지원 활동이 있었다. 농장원 인력이 부족해 바쁜 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총동원된다. 그 시기 당국의 선전은 더욱 더 거세졌다. 새벽부터 방송차의 노래 소리와 방송원의 구호소리가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우리는 자랑찬 사회주의 건설자! 천리마 타고서 질풍같이 달린다... 모두 다 모내기 전투 한사람같이 참가하여 사회주의 부강조국을 쌀로써 받들자!”

고성의 모습 (이미지 출처 - 구글어스)

이런 구호를 내 걸고 강제로 새벽부터 집에서 밥하는 어머니들을 농장에 호출해 일을 시켰다. 엄마 대신 내가 나가는 적도 많았다. 오후시간에는 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농장이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때 농장일을 같이 하면서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했다.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쉬는 시간에는 게임도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그때 게임에 걸리지 않으려고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가끔씩 일하기 싫어 볏단 속에 숨어서 친구들과 키득거리다 선생님에게 걸려 꾸짖음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런 선생님과 같이 모내기 할 때는 개인면담시간이다. 자연스럽게 가정에 대해서도 물으시고, 어떤 부분들이 어려운지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수업 때는 무섭던 선생님이 그때만큼은 좋은 분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온종일 쭈그리고 있어 허리 아프고, 온갖 감탕이 온몸에 범벅되어 힘들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12년경부터 북한에는 손전화(핸드폰)와 액정TV가 나왔다. 잘 사는 집은 손전화, 액정TV를 소유하는 경유가 있었다. 액정TV는 220V전기가 없이도 배터리로도 USB를 이용해 영화를 볼 수 있다. 당시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TV를 잘 못 보고 있었다. 액정TV는 2014년경에 보편화가 되었고, 우리 집은 2015년이 되서야 액정TV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조금의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금지한 녹화물을 시청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개인이 영상을 다운로드 할 수 있는 USB 때문에 많은 영상들이 퍼졌다. 전기가 없어도 TV를 볼 수 있으니 뒤에서 친구들과 불순녹화물을 공유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내가 한국 영상을 처음 접한 시기는 2019년이다. 주변 친구들은 오래전에 시청했지만 난 두려웠다. 한국영상을 보다 잡히면 처벌이 어머어마 했기 때문이다. 많은 돈의 뇌물을 주지 않는 이상 적으면 노동단련대 크게는 교화도 간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다는 말에 조심히 밤마다 잠 안자고 보기 시작했다. 처음 시청한 한국 드라마는 그 유명한 "태양의 후예"였다. 이전에는 기껏해야 중국, 인도, 영국 영화나 보다가 갑자기 같은 언어가 같고 감정이 같은 영화를 보니 재미는 극에 달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명장면이었다.

고성의 모습 (이미지 출처 - 구글어스 고성3D)

2020년 2월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당국은 국경봉쇄와 함께 코로나가 세계가 이어진 바다를 통해 전염될 수 있다고 바다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고성의 많은 사람들이 수산부분에서 돈을 벌었는데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국경을 봉쇄하니 수입 물품은 2~3배가 뛰었다. 그 것 마저도 없었다. 쌀과 야채 빼고 대부분은 수입 물품이었는데 너무 비싸 기름도 제대로 못 먹었다. 코로나 시작 6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많은 집에서 사용하던 가전제품을 싼 값에 팔기 시작했다. 그때 돈 좀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사서 다른데 파는 방식으로 장사해 돈을 꽤 벌었다. 힘든 상황 속에 돈 벌는 사람은 더 벌고 없는 사람은 더 없이 살게 되었다.

그렇게 못 먹고, 못 입었어도 고향이 그립다. 엄마가 빚어 준 구수한 옥수수빵을 먹으며 친구들과 철없이 뛰놀던 학교, 숨바꼭질 놀이를 하던 눈감고도 알아갈 수 있는 동네 골목길에 가보고 싶다.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내 고향에 데리고 가 해산물도 잡고, 어죽도 지어 먹으며 고향을 자랑하고 싶다. 통일이 되는 날 부모님도 만나고, 친구들과 그 시절의 우정을 나누고 싶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