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 제 2 편

황해남도 옹진군

이번에 떠나볼 곳은 황해남도 옹진군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옹진! 지금은 비록 옹진반도가 북한의 황해남도와 남한의 인천광역시로 나뉘어져 있지만, 이렇게 웹진 '이음'을 통해 북한 황해남도 옹진의 고향 소식을 접해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럼 바다 건너 같은 듯 다른 옹진의 모습은 어떠한지, 아련한 그 시절 추억 속으로~~ 고고!

*기고자의 이름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기재하지 않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내 고향은 황해남도의 옹진반도에 있는 살기가 좋은 곳이다. 서해바다를 끼고 있으며 주변에는 작은 섬들이 둘러 있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현재 한반도의 옹진군은 6.25전쟁으로 남북한이 둘로 분단되어 인천광역시 옹진군과 황해남도 옹진군으로 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옹진군을 신해방지구로 이야기 한다.

옹진군 어촌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바다에 나가서 조개, 굴, 낙지, 김, 전복, 해삼 등 여러 가지를 채취하여 팔고 나머지는 먹기도 하면서 살았다. 옹진군 내 수산사업소, 천해양식사업소와 외화벌이 기관에서 생산된 수산물은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는데 필요한 물량확보를 위해 개인들이 바다에 나가 채취한 수산물도 싼 값으로 구매하여 수출하고 있다. 주민들로서는 개별적으로 중국에 수출할 수가 없으니 와크1)를 가지고 수출하는 기관에 적당한 가격으로 매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외에도 바닷가 인근의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개별적으로 바다에 나가 채취한 다양한 수산물을 가공하여 개인 상인들에게 팔아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바닷가 지역에 온 상인들은 국경연선(압록강, 두만강 일대) 주민 또는 외화벌이 기관들이 현금과 물품을 가지고 와서 거래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때문에 바닷가 주민들, 특히 서해 바다가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다른 지역 대비 높은 이유이다.

1) 일종의 수출입 허가권

그러나 바다에서 돈을 버는 일은 쉽지는 않다.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잘못 계산하거나, 수산물을 채취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부 돈 있는 개인들만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안전하게 수산물을 채취할 수 있고, 대다수의 어촌 주민들은 썰물과 함께 갯벌로 나갔다가 육지로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쪽배(북한에서는 전마라고 부름)를 타고 가까운 섬에 가거나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섬에 가서 조개, 굴을 캐오기도 한다.

또한 옹진군에는 큰 천해양식사업소가 자리를 잡고 있어 주민들이 이곳에 의지해서 직장을 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기업소에는 김직장(5개반으로 나뉘어있는데 그 중 한 개반은 굴반이라고 엄마들이 입사하여 매일 굴을 캐다가 직장에 공출), 다시마직장(4개 반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북에서는 곤포직장이라고 함), 미역직장(4개반), 공무직장(기관배나 전마를 수리하고 만드는 곳), 창고직장(기업의 모든 자재를 관리하는 곳), 9호 직장(특제품 직장이라고도 함)이 있다.

[옹진군에서 본 서해바다, 구글3D]

9호 직장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제품들을 가공하여 1호 제품으로 올려보내는 곳으로 다른 직장들과 달리 울타리 위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보위대가 정문에서 지키고 있어 직장인들 외에는 출입금지가 되어 있으며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9호 직장에 다니면 다른 직장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들어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직장이 아니다. 우선 출신성분, 사회성분, 학교생활 평정서 등을 통과해야 하고 다음 중요한 것은 건강검진을 해서 합격이 되어야 입사한다. 아침에 출근하여 일을 시작하기 전 매일 아침 목욕을 하고 발밑에서 머리끝까지 모두 위생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제품생산에 들어간다. 생산된 제품은 1호 제품으로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당일로 평양으로 보내곤 했다.

이전에는 곤포직장, 미역직장은 매일 저녁 바다에서 생산물들이 많이 들어와 말릴 자리가 없어 사람이 다니는 길 옆에 펴서 건조하였기 때문에 온 마을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역 다시마 냄새가 없어지지 않았다. 멸치 철에는 들어오는 생선물을 받아서 삶은 다음 햇빛에 말리곤 하던 생각이 난다. 김 역시 가공해서 바깥에 배재를 세워놓고 매일 들어가고 내가고 하면서 햇빛에 말리곤 하였다. 그때는 냄새도 싫고 먹기도 싫었는데 지금은 세월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살기가 좋은 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땔감이 제일 부족하다. 야산들에 나무들이 무성했는데 사람들이 땔감이 없어서 조금씩 베어다 연료로 사용하다 보니 지금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큰 자루를 들고 먼 거리 산에 가서 솔잎들을 쓸어 담아와서 땔감으로 충당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땔감이 엄청 비싼데 구멍탄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조금은 생활이 괜찮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옹진군뿐만 아니라 황해남도에는 가행되는 탄광이 거의 없다. 때문에 석탄을 타 지역에서 구입하여 운반하여야 하는데 타 지역도 석탄 생산량이 많지 않아 자기 지역에도 충당하기 부족하다. 게다가 북한의 교통상황이 최악인 조건에서 가령 석탄을 타 지역에서 구매하여도 해당 목적지인 옹진까지 오기에는 매우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옹진군 주민들은 연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곤란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매우 춥게 지낸다.

옹진군은 바닷가를 끼고 있어서 그 나마 다른 곳에 비해 살기가 좋아 고난의 행군 시기(1990년대) 다른 고장에서는 죽도 없어서 못 먹었는데 그나마 그 시기 입쌀밥에 생선국을 먹고 살았던 곳이라고 본다. 때문에 북한의 북쪽(함경도, 양강도 등)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살겠다고 내려왔는데 살 집이 없어 야산들에 올라가 땅굴을 파고 각자 살아갈 곳을 마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바닷가 고향에서 자랄 때 수영을 하고 싶었는데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학교에서도 다른 수업은 다 있는데 체육시간에 수영을 가르쳐 주는 과목은 없다. 그 때는 "왜 수영을 안 가르쳐 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 해 보니 이해가 간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수영을 할 줄 몰라 바다에 빠지면 살아나오기가 어려워 조금만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몸에 칠성판2)을 지니고 다닌다고 말하곤 했다. 온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안전하지 못한 배를 탔다던가, 아니면 개별적으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수작업으로 수산물을 채취하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바닷가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지금도 그런대로 북한 내에서는 살기가 괜찮다고 사람들이 인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옹진군은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연백벌이라고 하는 평화지대, 곡창지대에 있다 보니 큰 산이 없고 나지막한 야산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 보니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불가능하며, 그나마 야산에 나무가 있는 곳은 모두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옹진군 최남단 서해어촌에서 자라면서 가장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연평해전이 코앞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었다. 남한에서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북한에서는 더 많은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서해함대 사령부 군인의 가족들은 부대에서 보낸 방문요청을 받고 방문하였으나, 연평해전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소식을 알고 비통한 마음으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사전에 도착한 가족에게 미리 지침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전사한 군인들의 묘지는 개별적으로 묘지를 사용하지 않고 공동묘지로 관리하였다.

2) 관 바닥에 까는 널판

한반도, 한민족이 갈라져 살아야 하는 것도 비통한 일인데 서로 동족끼리 피를 흘리며 언제까지 싸우고 있어야 하는지? 그 해결책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 하나는 남북 간에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다양한 방면에서 신뢰에 기반한 남북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옹진에는 한국이 고향인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항상 고향과 가족을 그리면서 사는 분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뒤돌아보게 되었고 하루빨리 우리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서로 왕래하며 교류하는 시대가 오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앞으로 통일이 실현되어 백령도에서 내가 살던 옹진군의 어촌마을을 멀리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형제와 친척, 고향의 친구들을 만나보고 많은 옛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 작은 희망이고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