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 사업
고려의 심장,
송악산 아래 다시 깨어나다
'사진으로 보는 그 때, 그 순간' 코너는 사회문화 분야 대표적인 남북 협력 사업 관계자를 찾아가 당시 사업의 사진들과 함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합니다.
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김경순 사무국장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 만월대 터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 현장
고려 왕궁,
닫힌 역사의 문을 열다
송악산 남쪽 기슭, 개성 만월대. 918년 태조 왕건이 개경으로 천도하며 조성한 이 궁궐은 고려왕조 500년의 심장부이자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만월대는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폐허로 변했고,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장과 연회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909년, 순종의 서북순행(한양→신의주) 중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동행하며, 패망한 왕조로 비춰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영광과 오욕의 시간을 보내며, 천 년을 넘게 버텨온 장소가 바로 개성 만월대입니다.
고려시대를 연구한 어느 학자는 문헌자료를 열심히 들여다봐도 잘 이해되지 않는 개성의 지형을 고민하다가 문득 "개성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료에서 해석되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이 깊이 체감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고려왕조시대 왕궁터의 '중심부'에 접근하지 못했던 남측 연구자들에게 있어 2007년에 남북이 손을 맞잡아 시작한 만월대 공동 발굴은 오랜 숙원 사업의 시작이었으며, 문화유산 협력의 획기적 출발이었습니다.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와 유적 답사
합의를 이끌어낸 힘, 진정성
만월대 발굴 협력의 불씨는 2005년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논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프로젝트 앞에서 남북 간의 문화유산 복원 방식의 차이, 보존 상태에 대한 의문은 내놓고 말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북측은 문화유산 교류를 당국 간에 직접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북측은 "경복궁을 북한 정부가 가서 발굴한다면 남측이 서명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졌고, 남측은 "파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런 난관 속에서 양측은 막혀있는 지점에 대해 서로 솔직하게 질문하고 답하면서 간극을 좁혀 나가며,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개성 만월대 구조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 지도 및 연혁
발굴 구역 – 서부건축군
만월대는 중심건축군·서부건축군·동부건축군으로 구성됩니다. 발굴사업 대상지는 북측이 1950년대부터 꾸준히 조사한 중심건축군과 서북건축군을 제외하고, 미발굴 상태로 남아있던 서부 건축군으로 정해졌습니다. 서부 건축군은 고려 건국 시기에 태조 왕건이 지은 궁궐 건물터이자 미발굴 상태로 남아있던 곳이며, 경녕전을 비롯하여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 밀집된 구역으로, 비교적 원형이 보존된 곳이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본격 발굴로
2007년 봄, 1만 평을 대상으로 시굴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모눈종이처럼 가로·세로 홈을 파 유물 분포를 확인한 결과, 유적은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수많은 유물이 드러났습니다. 시굴조사 성과가 기대 이상이어서 그해 가을에는 바로 본격 발굴로 이어졌습니다.
2007년 발굴 첫 삽 기념사진(남북공동조사단 전원)
정치 상황에 흔들린 발굴
2010년 발굴 도중 천안함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부는 5·24 조치를 발표하기 직전, 개성 만월대 발굴 현장 철수를 지시했습니다. 당시 현장은 미뤄져왔던 토층 조사를 위해 수직으로 땅을 파 놓은 직후의 상태였는데 중간에 덮지 못한 상태로 떠나와야 했습니다. 한 고고학자는 이런 상태를 '통조림 뚜껑을 따놓고 방치한 상태'에 비유하며 빠른 현장 복귀를 촉구했습니다.
< 연도별 개요 >
2010년 |
발굴 중 천안함 사건 발생, |
2011년 |
김정일 위원장 사망으로 조기 철수 |
2014~ |
광복 70주년 계기, |
2016년 |
북한 핵실험·개성공단 전면 중단, |
2018년 |
제재 속 유일하게 추진되었던 |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조사단은 작업 중이던 현장을 그대로 두고 조기 귀환해야 했습니다. 발굴 중단이 이어지면 유적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우려 속에, 남북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2014~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장기간 발굴 조사가 가능했던 시기입니다. 특히 2015년에는 6개월 동안 조사단이 개성에 상주하며 발굴과 연구를 이어갔고, 금속활자가 출토되는 믿기지 않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남북 조사단 간 신뢰와 유대가 깊어진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전면 중단으로 발굴은 다시 멈췄습니다. 내년부터는 일년 내내 발굴하자던 남북의 약속은 멈췄지만 북측이 처음으로 단독 발굴을 진행하여 고려 금속활자 5점을 추가로 발굴했습니다.
2018년, 제재가 전면화된 상황에서도 발굴은 계속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변화하는 남북미 관계의 틈바구니에서 이미 반출 승인을 받아놓았던 장비와 자재조차 반출이 거부되었습니다. 트럭 운송이 불가하여 온전한 각목 하나도 반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한 만월대 유적의 보존 조치는 불가능해졌고, 발굴 작업은 작은 손도구들로 작업이 가능한 구역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유류 반입이 금지되면서 발전기 가동이 불가능해 조사단은 숙소에서 충전한 전기에 의존해서 작업해야 했기에 작업 효율은 떨어졌고, 화장실 같은 기본 시설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조사단은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유례없이 어려운 조사 환경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길'로 일컬어지는 대형 계단을 발굴하여 고려 황제의 주요 동선을 확인하고, 고려청자 접시와 잔을 다량 출토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발굴 작업은 중단되었고, 내년에는 연초부터 계속 발굴하자던 약속이 또 다시 지켜지지 않으며, 지금까지 중단되어 있습니다.
2018년 발굴조사 당시 밧줄로 돌을
함께 옮기는 모습
남북공동 조사단 발굴조사 모습
만월대가 품은 보물들
청자음각모란당초문대형기
높이 70cm, 용도 미상.
재현 불가에 가까운 제작 기법
고누기와
주춧돌 적심에서 발견,
놀이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
'월개동똥' 명문기와
제작처와 제작자의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
고려 금속활자
직지보다 최소 16년 앞선
1361년 이전 제작 추정
새모양잡상기와, 용두잡상기와
건축 장식 변천의 사례
남북공동조사단이 함께 기른 강아지
개성 민속여관
여름 간식 아이스크림
발굴 현장의 특별한 동행
2015년 여름, 발굴 현장에 북측 조사원이 자전거 바구니에 강아지 두 마리를 태워 나타났습니다. 처음으로 장기간 추진되었던 발굴 사업에 설레며 남측 손님들을 위한 '약개'라며 데리고 온 강아지였습니다. '약개'의 의미를 몰랐던 남측 막내 조사원의 "우리가 키우는 건가요?"라는 해맑은 질문에 두 마리 강아지는 '송악'이와 '만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송악'이와 '만월'이는 발굴 현장에서 자투리 자재로 만든 집에서 조사단의 도시락을 먹으면서 남북 조사단이 함께 기르는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송악이와 만월이는 조사단이 아닌 모르는 사람이 가까이 오려고 하면 열심히 짖어대곤 했습니다. 그러나 송악이는 병으로 죽고, 만월이는 발굴이 끝나던 2015년 12월 말에 '내년에 만나자'는 인사로 헤어졌습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연이은 개성공단 폐쇄로 발굴조사가 중단되면서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개성에서 함께한 이 작은 생명은, 냉엄한 분단의 현장에서 피어난 소소한 연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남북공동조사단 발굴조사 모습
현장의 삶
개성에서 생활한 남북 조사단은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온 타지 사람이었습니다. 북측 조사단은 개성 민속여관에서, 남측 조사단은 개성공단 숙소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줄이기 위해 함께 먹었던 '현장 도시락', '개성 특산 우메기와 약과', 여름 간식 '오이냉국과 북한의 아이스크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장기간 함께 생활하며 남북 조사단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족 이야기와 안부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발굴 조사 기간 중 시험을 보러 간 남측 조사원에게 북측 동료들이 응원의 편지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남북공동조사단 발굴조사 모습
발굴의 의미
만월대 공동발굴조사는 단순한 문화유산 조사를 넘어 남과 북이 어떤 지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서로 공유하고 토론하는 역사 복원 작업이었습니다. 발굴 현장은 남북한의 사람들이 출신과 상관없이 발굴조사단과 지원팀으로 뒤섞여 재편되는 신기한 경험을 안겨주었고, 남북 조사단이 경험한 일상의 교류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탐색과 단기적인 약속에서 출발해 중장기 계획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처럼 남북 간 상호신뢰와 학술적 성과를 기반으로 협력사업을 진행하며, 함께 이룬 질적인 변화의 경험은 향후 다른 분야의 교류·협력으로 확장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남북이 함께 발굴하던 만월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석재유구(석재로 만든 구조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발굴은 필연적으로 문화유산의 훼손을 동반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훼손을 최소화시키면서 중요한 고려역사의 정보 획득을 목표로 해야 할 것입니다.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 재개는 미래를 향한 약속이자 역사에 대한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