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 제 5 편

개성

나의 고향은 깨끗하고 작은 도시인 개성이다. 개성은 역사 유적이 많은 도시이다.
내가 살았던 때에는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은 특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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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남대문

개성은 남대문을 중심으로 가로수가 즐비한 4개의 큰 도로가 있다. 남대문을 중심으로 뒤쪽에는 만월대가 있는 송악산이 보인다. 송악산 안에는 여러 절이 있지만 모두 스님이 없는 절이다. 나라에서 관리만 하는 것 같다. 송악산 오른쪽 끝자락에는 '고려 성균관'도 있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인데, 어릴 적에는 성균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촬영에 동원된 적도 있었다.

남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자남산이 있다. 언덕 제일 높은 곳에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데,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명절이나 김일성 탄생일에는 예쁜 한복을 입고 김일성 동상을 찾아 가파른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올랐다. 김일성 동상 앞에는 꽃바구니와 꽃을 증정하려 모여든 사람들로 꽃물결을 이뤘다.

- 선죽교(사진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자남산 우측으로 가면 선죽교가 있다. 선죽교는 정몽주가 철퇴를 맞았다는 핏자국이 생생한 유적이다. 시골 쪽으로 더 가면 분계연선인 판문점이 있는데, 어릴 적 판문점 근처에 있는 친척 집을 갔다가 그때 처음 태극기를 봤다.

남대문의 서쪽으로는 푸른 잔디가 펼쳐진 송도 광장이 있다. 송도 광장은 각종 대회나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로, 휴일 전이나 기념일에는 군중 무용이 펼쳐지기도 했다. 대학생, 각 직장 청년들이 모여 둥글게 원을 그리며, 음악에 따라 군중 무용을 한다. 방학 중 새벽 5~6시가 되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남대문 중심에 모여 달리기를 했다. 체력 단련을 위해 구호를 외치며 달리기를 하던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그 길로 쭉 가면 개성역도 있고, 개풍군으로도 갈 수 있다. 개풍군에 가면 한국의 강화도가 보인다.

개성 곳곳에는 민간, 군인 규찰대가 있었다. 여자가 바지를 입고 다닐 경우, 김일성 초상화를 달지 않을 경우 규찰대가 단속하여 학교나 직장에 통보했다. 단속에 걸린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생활총화 때마다 사상투쟁 대상이 되고, 3번 이상 단속에 걸릴 경우 무보수 노동 단련대에 보내졌다. 가끔 귀한 외국 손님이 오거나 큰 행사가 있을 때, 온 식구가 인도를 청소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꼭두새벽에 걸레와 물 대야를 들고 인도로 나와 물걸레로 박박 닦아내야 했다.

한겨울에는 매일 새벽마다 동장(인민반장)과 주민 1명이 한 조가 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드린다. 과거 우리 가족 모두가 연탄가스에 질식한 채로 자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새벽에도 어김없이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드리던 동장(인민반장)과 주민들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인기척이 없자, 문을 따고 들어온 동장(인민반장)이 가족을 발견했고, 우리에게 김치 국물을 먹였다. 동네 주민들은 우리를 끌고 나와 흙바닥에 엎어 놓았는데, 김치 국물 덕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툭툭 털고 일어났다.

돌이켜 보면, 가장 좋은 시절은 1970~1980년대였다. 그때는 보름에 1번씩 배급을 주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나름 먹을 걱정이 없던 시절이었다. 개성 지역은 지리상 남한이 지척에 있어 분계연선이라는 특별시로 되어서 그런지 배급도 조금은 특별했다.

매달 1인당 계란 10알과 기름, 간장, 된장을 받았고, 김장철에는 동태도 김치에 넣으라고 몇 마리씩 배급받을 때도 있었다. 식구가 많을 경우, 한 달에 계란을 100알씩 주기도 했는데, 우리도 계란을 많이 받아 부침개를 만들어 먹었던 때도 있었다. 잡곡(옥수수쌀) 70%, 쌀 30%로 배급을 주는데 잡곡의 2~30%는 옥수수 국수로도 배급 받아 저녁은 무조건 국수로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우리 오빠는 세상에서 국수가 제일 싫다고 했다.

또 그때는 시에서 운영하는 상점에서 5원이면 온 식구가 먹을 정도의 개성만두나 군고구마를 살 수 있었다. 그러다 1990년 후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특별도시인 개성도 비껴가지 못하고 모든 배급이 중단되었다.

- 고려 성균관(사진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개성 만월대(사진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그러다 1990년 후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특별도시인 개성도 비껴가지 못하고 모든 배급이 중단되었다. 모든 것이 단절된 개성에 있다가는 굶어 죽을까봐 돈 번다고 고향을 뜬 사이, 우리 엄마는 '입 하나 덜면 내 새끼가 안 굶어죽겠지..'하며 스스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을 송두리째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아직도 아려온다.

조금만 더 버티시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지..
통일이 되면 갈 수 있으려나.. 아니 내 생에 다시 갈 수 있을까..
형제들이여 제발 살아만 주오..
고향은 부모님이 묻혀 있는 곳, 형제들이 사는 곳..
내 고향..

고향을 생각하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엄마 얼굴에 그리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애절하게 끓어올라와 가슴이 아파온다. 지금도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서 잠깐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고향. 하루 빨리 통일이 오기를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