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빛은 국경을 넘는다
글.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객원연구원 김영희
추석이면 떠오르는 그리운 풍경
올해 추석은 10월 6일이다. 한국에서는 이맘때면 뉴스마다 민족 대이동을 예고하고, KTX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좌석이 동난다. 사람들은 부모님은 물론 지인들에게 건넬 선물을 고르느라 고민에 빠진다. 한국의 추석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가족의 의미와 정을 되새기는 특별한 날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온 나에게 추석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북한에서 내가 겪었던 추석은 풍성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축제였을지 몰라도 내게는 국가가 허락한 '조용한 의례' 같은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풍성한 추석을 맞을 때마다 그 시절 고향의 소박함과 아련함이 함께 떠오른다.
추석이 사라졌던 나라
북한에서 추석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건 1967년이었다. 당시 북한 정권은 추석과 같은 전통 명절을 '봉건유물'이라며 없애버렸고, 조상 숭배를 사회주의 사상과 맞지 않는 미신으로 규정했다. 설날조차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문화는 법으로 금지한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어져온 조상 숭배의 관습을 북한 당국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결국 1972년부터는 성묘를 허용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공식 휴일도 아니었고 달력에도 표시되지 않았지만 추석이 되면 사람들은 차례 음식을 머리에 이고 조상의 묘가 있는 산으로 향했다. 기관이나 공장에서는 암묵적으로 조퇴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산소가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 이야기였다.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 지방으로 옮겨와 조상들의 묘가 없었다. 추석날이면 친구들이 산소로 떠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송편을 먹을 생각에 신나서 뛰어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북한에서 떡은 귀한 음식이다. 배급 시절, 떡 한 끼에 들어가는 쌀은 밥 한 끼의 두 배였다. 평소 200그램이면 한 끼 밥이 되었지만, 떡은 무려 400그램의 쌀이 필요했다. 그래서 떡은 김일성 생일이나 설 명절 같은 공식 명절에나 겨우 맛볼 수 있는 특별하고 귀한 음식이었다.
추석에 친구들이 먹던 송편은 내게 명절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그리움'이었다. 나는 일부러 산소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들이 보자기 속에 남은 송편을 하나씩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지금도 그 따뜻한 온기와 송편 안에 든 줄당콩의 구수한 맛이 잊히지 않는다.
민속명절로의 부활
북한에서 추석이 다시 '명절'의 지위를 되찾은 건 1988년이다. 민족 정서를 끝내 무시할 수 없었던 북한 당국은 그해부터 추석을 '민속명절'로 지정하고 조상을 기리는 의례와 민속놀이를 일정 부분 허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김일성 생일(태양절)이나 설날 같은 의무적이고 성대한 명절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추석은 여전히 '산소가 있는 가족'에게만 허락된 명절이었다. 차례는 집이 아니라 산소에서 지내는 게 일반적이었고, 상차림 역시 매우 간소했다. 햅쌀밥과 송편, 말린 생선이나 과일 몇 점이 전부였다. 공식적인 휴일도 하루뿐이었고, 남한처럼 연휴나 대체공휴일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면 서울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고향으로 수백만 명이 움직이지만, 북한에서는 이러한 '민족 대이동' 자체가 없었다. 기차나 자동차, 버스의 운행이 철저히 통제되고 제한되었기에 먼 거리를 오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에서의 추석은 '민속명절'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민족 전체가 함께하는 날은 아니었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일도, 명절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도 없다. 오히려 간부나 열사 가족들은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을 찾아 추석에도 충성 의례를 치러야 했다. 결국 북한의 추석은 전통적인 명절보다는 '조상 참배의 날'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한국의 추석은 가족이 중심이고, 따뜻한 마음이 오가는 명절이다. 온 가족이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칠 정도로 풍성한 차례 음식을 함께 먹는다. 누군가는 과도하다고 지적할 만큼 음식과 선물이 넘쳐나지만, 그만큼 가족과 전통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깊이 담겨 있다.
최근 달라진 북한의 추석 풍경
내가 북한에서 추석을 경험한 것은 벌써 수십년 전 일이다. 그 시절만 해도 추석은 산소가 있는 일부 가족들이 간소하게 보내는 소박한 명절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북한의 추석 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요즘 북한에서 추석은 이전보다 훨씬 화려해지고 다양해졌다. 성묘를 가기 위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가족들이 흔해졌고, 돈만 있으면 택시를 타고 산소를 찾는 경우도 많아졌다. 심지어 도시에서는 버스를 통째로 빌려 여러 가족이 함께 이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과거에 이동 자체가 사치였던 시절과는 크게 다른 풍경이다.
차례상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해졌다. 문어다리나 이면수, 명태 같은 값비싼 생선이 오르고 사과, 배, 대추, 밤 등 다양한 과일도 올라간다. 술병과 사탕, 과자도 당연히 있고 녹두전, 수수전 같은 다양한 전도 빠지지 않는다. 북한에서 추석 차례상은 이제 단순히 조상을 기리는 의미를 넘어, 그 집안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추석이 풍성해질수록 북한 내부의 빈부 격차도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차례상을 화려하게 차릴 수 없거나 이동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이 어려운 집안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주는 날이 되기도 한다. 북한에서 최근의 추석은 전통의 의미를 회복하는 동시에, 사회가 가진 경제적 격차와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날이기도 하다.
마지막 소망 - 함께 송편을 빚는 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추석을 맞이한다. 아직까지 차례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정성껏 전을 부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갈비찜도 만든다. 시장에서 송편을 고르는 내 모습이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남한의 명절 문화가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산소로 향하는 길목에서 송편 한 개를 얻기 위해 기다리던 그 아이의 마음이 생각난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북한 아이들은 어떤 추석을 보내고 있을까. 언젠가는 남과 북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함께 송편을 빚으며 같은 달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기를, 그리움 대신 만남으로 채워지는 추석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