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즌 2 - 제 6 편
강원도 원산

나의 살던 고향은 항구 도시 원산이다. 관광명소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거점인 이곳에는 다양성이 공존했다. 나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삼촌은 선장이었다. 삼촌은 원산항을 통해 일본과 교역하는 무역상인으로 일했다. 항구도시에서의 삶은 그렇게 바다와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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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상하다. 한국에서는 수학여행을 제주도나 외국으로 가지만 우리는 달랐다. 세 곳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문천소년단야영소,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 그리고 평양이었다. 모두가 수학여행을 가는 건 아니었다. 학교 중에서 모범학교의 반 1개만 선정되어 갈 수 있었다.
수학여행 대상자로 선정된 반은 3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부모가 간부이면 평양이 제1선택지였고, 그 외에는 문천과 송도였다. 경제적 여력만 뒷받침된다면 직접 선택할 수 있었지만,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원산 사람은 동 지역 야영소 이용 시 30% 할인을 받아 3천 5백 원을 냈고, 평양은 1만 원이었다. 2001년 초반 당시, 1만원은 원스타 간부의 한 달치 월급이었다. 시설은 모두 북한 정부 차원에서 관리했지만, 여행 경비는 전액 자부담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떼를 써서 돈을 마련했다. 친구들과의 추억과 우정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갈마역에서 약 8km 떨어진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로 추억의 여정을 떠났다.

송도는 북한에서 가장 오래된 동해바다 명소이다. 김일성, 김정일이 여러 차례 현지를 다녀가며 관리에 심혈을 기울인 곳이다. 해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만큼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4인에서 6인이 머무는 '단체 숙소'와 외국인 가족을 위한 '1인 침실'이 있었고, 볼링장, 탁구장, 전자오락실, 실내 수영장, 체육관 등 부대시설도 구비되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우리가 낸 경비에 비해 음식이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흰 쌀밥이긴 했지만 양이 너무 적었고, 반찬은 양배추와 단무지, 감자 반찬이 전부였다. 여행 마지막 날 정어리와 명태가 나왔는데, 추가 비용 5백 원을 더 냈다. 만찬의 대가였다. 하지만 나는 생선 두 마리를 한 끼의 밥도둑으로 먹을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처럼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는 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에서 유년기의 우정과 추억을 쌓았다.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의 모습 (출처 : 나무위키)

어른들이 우리나라를 '산 좋고 물 좋은 금수강산'이라고 말했는데, 원산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갈마에서 북쪽으로 10km를 가면 '원산경제대학'과 '원산농업대학'이 있어 형, 누나들의 대학 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56km 내려가면 현대 정주영 회장의 고향 '통천'이 나온다. 동해바다 해변가인 통천군은 해산물과 감이 많은 곳이다. 숙모 댁에 머물면서 좋아하는 감을 밥 대신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 난다. 달콤한 감을 베어 물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던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북한 내에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여러 지역을 경험할 수 있었던 건 장교였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군인은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발령지를 따라 이사해야 했다. 덕분에 여러 곳을 경험했지만, 친구들과 정이 들 만하면 헤어져야 하는 게 슬펐다. 그래서인지 쉽게 친구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적도 있다.
원산에서 마지막으로 이사한 곳은 남북이 맞닿은 최전선 '평강'과 '김화'였다. 그 지역은 남한의 강원도 화천 근처였다. 밤에는 논밭의 개구리 소리와 산 너머로 메아리치는 대북방송을 들으며 잠들었다. 방학에 도토리를 주우러 산을 넘다가 남한 방송이 선명하게 들리면 괜히 잡혀가는 게 아닌가 싶어 지레 겁먹고 집으로 뛰어 내려 오곤 했다. 이 모든 게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가끔 한국의 강원도를 가면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향과 부모님 생각에 잠 못 드는 때가 많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북한의 경제 상황까지 악화되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고, 결국 고향과 가족을 떠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바쁘게 살아가느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조차 잠시 잊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추석과 설 명절이 오면 부모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 이산가족 상봉 관련 뉴스를 볼 때면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이고 아픔임을 깨닫는다.
항구 도시 원산, 송도원의 푸른 바다, 통천의 달콤한 감, 최전선에서 들리던 개구리 소리와 대북방송. 이 모든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생생하다. 원산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삶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언젠가 다시 고향 땅을 밟고 부모님을 뵐 수 있기를 바라며,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