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속 북한,
일상의 변화를 말하다

글.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디지털국제협력연구실 부연구위원 서소영

1. 가정의 풍경이 바뀌다
앞치마 두른 리당비서
주인공 김형섭 리당비서는 부패한 농장을 바로 세우기 위해 새로 부임한다. 그는 혼자 내려오지 않는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농촌으로 이사하며, 가족이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내는 보건일꾼으로, 아들은 시골학교 학생으로 등장한다. 가족이 함께 시골로 이주하는 설정은 북한 드라마에서는 낯선 장면이다. 이전에는 남성이 '혁명 사업'을 위해 가정을 떠나는 서사가 많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가정이 사회의 일부, 변화의 단위로 등장한다.

출처 : 조선중앙TV '백학벌의 새봄'
특히 김형섭은 일터뿐 아니라 집에서도 함께한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아들에게 직접 농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북한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생활인으로서의 남성상'이다. 김정은 시대에 강조되는 '인민 중심의 정치'가 가정 속 인간적인 관계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이 단순히 따뜻한 가족 이야기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가정이 사회 변화의 단위가 된다는 것은, 가정도 더 이상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치적 과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북한식 '생활 속 정치화'가 드라마의 새로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2. 리당비서가 논에 들어가다
'생활형 간부'의 연출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리당비서 김형섭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논에 직접 들어가 모내기를 하는 장면이다. 북한 드라마에서 간부가 흙탕물에 들어가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동안 간부는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지시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조선중앙TV '백학벌의 새봄'
그러나 김형섭은 다르다. 그는 농민들과 같은 옷을 입고, 함께 삽을 든다. 농장원 중 한 사람이 "리당비서 동지가 진짜 같이 일하시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같이 땀을 흘려야 진짜 일이 되지요"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북한식 리더십의 변화를 보여준다. 명령하는 지도자에서 함께 일하는 지도자, 즉 '생활형 간부'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간부들이 모두 이렇게 변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이런 장면이 드라마에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북한이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리더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3. 사랑과 갈등의 등장
감정이 허용되는 사회
〈백학벌의 새봄〉에는 검사 영덕과 농업연구사 경미의 연애 이야기가 등장한다. 둘은 사랑하지만, 집안의 반대와 사회적 위치의 차이로 결국 결별한다. 이런 개인의 감정 서사는 과거 북한 드라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경미는 단순한 연애 상대가 아니다. 농촌의 과학농업을 이끄는 전문 여성 인력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한다.

출처 : 조선중앙TV '백학벌의 새봄'
그녀는 사랑보다 일과 책임을 선택하지만, 그 선택은 체제의 요구가 아닌 자기 신념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여성상은 북한이 최근 강조하는 '과학기술형 여성 혁신가'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즉, 여성의 주체성을 확대하려는 문화적 흐름이 드라마에서도 반영된 셈이다.
다만 이들의 사랑이 끝내 사회적 규범을 넘지 못했다는 점은, 여전히 개인의 감정이 제도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감정이 허용되긴 했지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은 아직 아니다.

4. '허풍' 없는 사회를 향해
간부 풍자와 자성의 메시지
〈백학벌의 새봄〉의 핵심 주제는 '허풍 척결'이다. 성과를 부풀리고 보여주기식 행정을 하는 간부들이 주요 비판 대상이다. 주인공 김형섭은 상급자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말한다.
"도로 옆 포전부터 모내기하라는 건 허풍입니다. 관습을 깨야 합니다." 이 대사는 단순한 농사 지시의 거부가 아니다.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를 향한 비판이다. 하지만 이 비판이 체제 자체를 향하지는 않는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개인 간부의 태도와 책임감으로 좁혀진다. 이런 서사는 최근 북한의 '허풍방지운동'이나 '간부 혁신' 캠페인과 직접 맞물린다. 드라마를 통해 문제를 드러내지만, 그 결론은 "더 진정성 있게 일하자"로 정리된다. 즉, 체제 비판이 아닌 내부 개혁의 언어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적어도 이제 북한 드라마는 완전한 미화에서 벗어나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진심 있는 일꾼'의 이미지를 새롭게 제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다.
5. 농촌의 현실과 과학의 언어
〈백학벌의 새봄〉은 농촌의 현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다룬다. 농업 인력의 부족, 청년층의 이탈, 교육과 보건의 열악한 환경 등이 그대로 등장한다. 이는 과거 협동화 시대의 대표작 〈석개울의 새봄〉(1958) 이 이상적 농촌을 그렸던 것과 대조된다.드라마는 농업의 과학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영양랭상모(營養冷床苗)'라는 새로운 모판 기술, 논판메기 양식, 젖염소 사육 등 실제 정책이 드라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이 장면들은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정책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번역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현실의 모든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농촌의 어려움은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그려지며, 정책 실패나 제도적 모순은 언급되지 않는다. 즉, ‘리얼리즘’의 외형을 빌리되 체제 비판으로 넘어가지 않는 통제된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6. 변화와 통제 사이
북한식 '생활 리얼리즘'의 의미
〈백학벌의 새봄〉은 과거의 영웅 서사에서 벗어나 일상과 감정을 중심에 둔 북한식 '생활 리얼리즘'을 시도한다. 김형섭은 영웅이 아닌 현실의 관리자이며, 경미는 희생이 아닌 실천의 인물이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이 단순한 선전 구호로는 더 이상 대중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이다. 그래서 이제는 '생활의 언어'를 빌려 체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드라마는 여전히 정치적이지만, 그 방식은 한결 부드럽고 현실적으로 변했다. 〈백학벌의 새봄〉이 보여주는 변화는 북한이 내부의 피로감을 인식하고 '생활'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조심스럽게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변화는 있지만, 그 변화는 관리되는 변화다.
7. 맺으며
'새봄'이 말하는 것
〈백학벌의 새봄〉은 북한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콘텐츠이다. 가정의 변화, 젊은 세대의 감정, 간부의 자성은 북한이 스스로의 변화를 '조율 가능한 범위' 안에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체제를 찬양하지도, 완전히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그 변화를 통제하려는 북한의 전략적 균형감각을 담고 있다. 북한이 더 이상 혁명 구호로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는 '생활'과 '감정'을 통해 공감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백학벌의 새봄〉은 시대적 전환점을 상징한다. 결국 이 작품이 말하는 '새봄'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변화의 시작, 북한식 현실 감각이 피어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