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 제 1 편

함경북도

나의 살던 고향은 두만강 근처의 새별군 사수리이다. 밤마다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중국 땅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밝은 곳에서 살면 좋겠다."라는 소원과 부러움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향에 있을 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등잔불을 켜거나 촛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곤 했다. 등잔불을 켤 때면, 연기로 인해서 콧구멍이 까맣게 됐다.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갈 때면, 뒤에서 누군가가 뒷통수를 후려쳐도 어느 방향에서 때렸는지 모를 정도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달이 뜰 때면, 마치 내가 그 달을 두 손에 쥐고 있는 것 마냥 밝았다. 지역 이름에 걸맞게, 하늘에서 쏟아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하우스 비닐을 찢어서 긴 장대에 묶은 다음 불을 붙여서 놀기도 했다. 불장난하면, 잘 때 오줌 싼다고 어른들이 늘 얘기했는데, 영락없이 그랬다. 그래서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의 기억과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쯤, 우리 학교에 한 여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 여학생과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볏짚을 집채만큼 쌓아 놓은 돼지굴에서 같이 놀며 나는 그 여학생에게 빠져버렸다. 그 여학생에게 오빠가 있었는데, 내가 여동생을 좋아한다는 건 어찌 알았는지, 그는 나에게 "담배를 사주면 동생에게 잘 얘기해 주겠다."라고 했다. 그 당시 북한에서 인기 있었던 '고양이 담배', '해돋이 담배' 등 비싼 담배를 헌납했지만, 짝사랑으로만 진행되다 고향을 떠나면서 7년 만에 막을 내렸다.

내 고향은 시골 지역이라 농사를 많이 했다. 어릴 때부터 작물을 심고, 가꾸고, 가을걷이까지 해야 했다. 모내기도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해야 했다. 농사 외에는 정기적으로 배급을 주지 않았기에, 북한이 선전하는 것처럼 생존을 자력갱생으로 해야 했다.

배급을 충분히 주지 않으니 옥수수와 벼를 훔쳐야 했다. 그래서 바지 벨트와 옷 안쪽, 팔에 옥수수를 이삭 채로 숨겨서 집에 가지고 왔다. 벼가 익는 시기에는 옷 안쪽에 여러 개의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안에 벼를 잔뜩 숨겨서 가지고 왔다. 가을철에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라 경비원들도 모른 척 넘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식량이 모자라, 어떤 가정에서는 겨울에 옥수수 찌꺼기에 시라지(시래기)를 넣어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겨울에는 땔감이 없어, 얼음장 같은 바닥에 솜뭉치 이불을 여러 겹 깔고 자는 집도 있었다.

우리 지역은 4계절 내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우리 가족은 여름에는 민물고기를 잡고, 겨울에는 기름 개구리를 잡아 시장에 팔아서 식량을 마련했다. 보통 1년에 마른 민물고기를 120kg 정도를 잡았는데, 거의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옥수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민물고기를 시장에 팔아서 옥수수나 쌀 등을 사고는 했다.

2009년에는 인플레이션 억제와 시장통제, 계획경제 복원을 목표로 화폐 개혁이 이루어 졌다. 당시 100원짜리를 1원권으로 교환했고, 최고 화폐 단위를 100원으로 했다. 그리고 세대당 100만 원 한도를 적용했다. 화폐 개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돈을 잃었다. 그리고 그 후로 부자들은 북한 돈이 아닌 중국의 위안화(인민폐)와 미국의 달러를 소유하기 시작했고 북한 내에서도 북한 원화는 가치를 잃었다.

우리 지역은 담배가 유명하다. '새별 독초'라고 하면 다들 알아줬다. 담배가 얼마나 독했는지, "담배 한 모금에 목이 멤, 두 모금에 머리가 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 군은 시골 지역이기도 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이기도 했다. 워낙 땅끝이라 김씨 일가가 올 리 없는 지역이었는데, 어느 날은 현지 시찰 올 수도 있다고 해서 온 새별군이 도시 청정화 사업을 한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 당시 북한이 지방발전, 도시 청정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직후였다. 그래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장군님의 현지 시찰 준비를 한다'고 모두가 아침 일찍부터 강제로 동원됐다. 대도로 옆에 있는 개인 집의 나무로 된 울바자(울타리에 사용하는 대, 갈대, 수수깡, 싸리 등 재료)를 다 없애고 벽돌로 된 담장을 새로 쌓아 올렸다. 각 지역 별로 구역을 나눴고, 인민반 별로 그 구역을 맡아서 담을 쌓았다. 그렇게 보름 정도 열심히 청정화 사업을 하고 나니 도로가 한결 정리돼 보였다. 온통 불만을 늘어놓으며 열심히 했지만, 현지시찰은 없었다.

고향에서는 1월 1일과 추석을 중요한 명절로 여긴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온 가족이 다 모여서 떡과 고기, 쌀밥 등을 같이 해서 먹는다. 그때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떠들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한국에서는 그런 명절의 풍경이 사라졌다. 명절이 되면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런 고향에서의 따뜻한 시간들이 가끔 그리워지곤 한다.

나의 고향, 새별군 사수리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다. 그곳의 풍경도, 사람들도, 생활도 이제는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나날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만든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내가 살던 그 시절,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며 가졌던 작은 소망처럼, 나는 여전히 밝은 곳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