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의 변주 :
'싸나이'에서 뉴노멀로
글.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박민주 교수
이 안에 너 있다
2025년 방영된 조선중앙TV 22부작 드라마 ‘백학벌의 새봄’에서 남성 주인공 영덕이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연인 경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언젠가 말했지? 경미는 늘 여기 있다고.”
출처 : '백학벌의 새봄' 드라마(17화)
소중한 이를 ‘마음(심장)에 담는다’는 표현은 북한에서 널리 통용된다.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도 있고 지도자 초상휘장은 ‘심장 가까이 모신다’ 고 표현한다. 다만 ‘심장에 남는 사람’은 통상 여성이 부르며, 초상휘장 역시 연인이 아닌 지도자에 대한 태도를 의미한다. 때문에 이 드라마처럼 남성이 연인을 마음에 담고 있다고 말하거나, 자기 가슴(심장)을 두드리기까지 하는 고백 장면은 그간의 통상적 북한의 작품 연출과 상당히 다른 측면이 있다.
여성시대에는
남자가(도) 화장을 한다
최재천 교수님의 통찰처럼, 특정 성별에 대한 이상향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백학벌의 새봄’ 역시 전형을 벗어난 남성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북한의 이상적 남성상 ‘싸나이(lads)’와는 일치하지 않는 면모들을 보인다. 통치에 충성하며 사적 감정과 가족이란 없는 듯 사는 1등 전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언급한 바 직접적 애정 표현을 하는 남성뿐만 아니라 돈주 아내 대신 앞치마를 입고 밥상을 차려오는 중년 남성 간부도 등장한다. 이처럼 새로운 남성 캐릭터가 국영매체에 등장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AI 활용 이미지
북한에서는 원칙상 모든 영상, 이미지, 문서가 당국의 관리 아래 제작되기에 대체로 당국이 지향하는 이상향이 그려진다. 동시에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일정부분 주민을 설득하거나 주민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일상과 동떨어진 허구만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확연히 달라진 현실과 주민의 기대를 승인하는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에 나타난 새로운 남성상은 북한 주민의 선망과 실제 삶에서의 '뉴 노멀'을 일정부분 반영하는 셈이다.
이처럼 새로운 남성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배급제가 중단된 이후로, 노동신문 등에 아내를 돕는 남성의 모습이 미덕으로 그려져 왔다. 물론 여전히 가정을 여성 영역으로 상정하긴 하지만, 남녀의 조화로운 협력과 협업을 권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제 북한 남성들의 변화는 북한이탈주민 인터뷰를 통해서 확인되기도 한다. 특히 최근 청년 세대 대다수는 아버지-세대주 중심의 배급제가 아니라 어머니-사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성장했다. 상황적으로도 시장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여성 혼자 장사하기 힘들기 때문에 협업이 필수가 되었다. 때문에 이들은 남성이 집안을 이끈다는 가부장적 사고보다는 남녀의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녀양육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좋은 아빠되기(fathering)에 힘쓴다. 아버지 세대와 비교하면, 이들에게서 고전적인 ‘싸나이’ 면모는 상당 부분 약화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집단과 가정 사이,
'세대주'의
현실과 '죄책감' 논리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확연한 반면, 남성을 가족 대표 '세대주'로 상정하는 법제적 구조는 큰 변화가 없다. 북한에서 세대주란 생계부양자가 아니라 가장권을 지닌 가족 대표자로 통용된다. 남성 세대주는 월급과 배급을 받지 못해도 직장에 반드시 출근하여 당과 국가에 헌신하며, 가족들은 세대주 보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러나 시장화 이후 가족 단위 생활, 곧 생계유지에 우선순위를 두는 남성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노동신문에는 세대주의 정치사회적 책무에 대한 언설이 종종 등장한다. 가령, “소문난 혁신자”였던 한 남성이 “여러 가지 생활상 곤난이 겹쳐들자” 자신이 겪었던 “변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 자식과 아내 앞에 세대주로서의 구실을 바로 못한다는 소위 자책감으로 방황하던
나는 아프다는 구실로 사업소에 출근하지 않고 나쁜 길에 들어서
(중략) 집단의 믿음이 어느새 나에게는 부담으로 되였던 것이다."1)
대다수 주민의 현실은 노동신문도 언급하듯 “세대주로서 가정부터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괜찮은 곳으로 직업을 옮겨야겠다”는 결심이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남성들이 쩍하면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을 대고 출근을 하지 않고 자신과 가정만을 위해 뛰어다니게 되자 출근률이 한심해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북한당국은 이런 뉴노멀 세대주들에게 “아버지처럼 살며 일하고 있는가를 다시금 돌이켜” 보라고 권고한다.2) “마음을 고쳐먹고 직장에 제대로 출근”하지 않는 남성은 가정과 사회에 이중의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 언설이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만큼 남성들의 삶과 지향이 되돌릴 수 없는 양태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1) [사회주의 근로자로 떳떳이 살자!] 집단의 사랑과 믿음속에 사는 긍지, 2025년 8월 12일 노동신문,
청류건설관리국 영흥건설사업소 작업반장 전영성
2) [사회주의 근로자로 떳떳이 살자!] 애국의 대를 참답게 이어간다는 것은, 2025년 9월 15일 노동신문, 개천시송배전소 노동자 박진명.
지난한 분단, 치열한 삶,
따로 또 같이 변주되는
한반도의 남성성
남북의 체제 경쟁은 한반도를 관통해서 정치군사, 경제, 노동, 가족, 성역할 등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와 일상 전반에 침투했다. 특히 청장년 남성은 강한 군인, 성실한 노동자로 호명되었고 또 가장 먼저 동원되었다. 그러다 남북 모두 1990년대 중반, 각각 중대한 전환기(배급제 중단, IMF)를 겪게 되면서 남성의 삶과 남성상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우 시장화 이후 국가가 생존을 보장하지 못함에도 출근과 동원은 지속된다. 다만 시장화가 30년에 이르면서 시장 경쟁과 통제가 점차 증가하여 여성 혼자의 사경제활동만으로는 가족 생계유지가 어려워졌다. 때문에 남성들은 출근 전, 퇴근 후 가사노동이나 장사 보조 등으로 여성과 역할을 분담한다. 공식 직장 생활은 최소화하고 가족 단위의 생계 유지에 더 많은 힘을 쏟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기에 이권 접근성이 좋은 소수의 직장이나 간부 직위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다. 때문에 연령층이 젊어질수록 이념과 당성, 충성보다는 그 외피와 실리적 내피의 균형을 잘 찾아가는 것이 남성의 능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압축적 산업화와 급속한 민주화, 분단과 병역 의무, IMF 이후 신자유주의 기조 등이 무한 경쟁을 촉발했다. 건강, 감정, 관계, 외모, 재산 등의 개인 생활까지 스펙이 되었고 성별노동분업의 굴레는 남성들에게 자기 경쟁력을 매 순간 입증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젊은 세대일수록 권위와 힘보다는 평등, 평화, 지속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특히 이들은 기성세대의 가부장적 남성이나 가장으로서의 무조건적 희생이 남녀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념, 조직, 관행, 국가 규율에 순응하기보다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고민에 기반해서 가정, 사회, 직장 곳곳에서 여러 실천을 감행하고 있다.
피로사회, 싸나이가 아닌
뉴노멀을 택하는 남성들
장기간의 분단 체제는 한반도 곳곳에서 이념에 충실한 국민, 언제든 희생이 각오된 강한 군인, 경쟁에서 승리하는 노동자, 강력한 가장권을 지닌 “싸나이”를 남성 모델로 구성해왔다. 그러나 남북한의 남성들은 시대 변화를 통해, 또 선배 세대를 통해 얻은 교훈에 기반해서 새로운 남성상을 구현해나가고 있다. 급변하는 피로사회에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처럼 사는 일이 시의적으로 적합하지 않고 또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지만 이제 한반도의 남성들은 자기가 사는 남북 사회 곳곳에서 이념보다 실리를, 체면보다 친밀성을, 소외되기보다 어울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놀랍도록 유사하다. 누가 알겠는가. 이런 동시대적 뉴노멀의 등장이 새로운 남북관계를 도출해낼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