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시즌 3 - 제 3 편

평안북도 용천군

나의 살던 고향은 평안북도의 쌀 고장 용천군 덕승리이다. 덕천산을 중심으로 마을들에 둘러싸여 있고 동강의 지류가 감도는 산 좋고 물 맑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한반도 최서단 압록강 하구에 있는 용천군은 황해로 들어가는 용천평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해있어 밀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황해 연안의 여러 섬들 중 신도, 황금평, 서호도는 처음에는 신의주시, 이후 용천군, 최종적으로 1988년에 압록강 하구의 섬들과 합쳐져서 신도군으로 편입되었다.

용천군은 동쪽으로 피현군, 남쪽으로 염주군, 북쪽으로 신의주시와 접해있다. 용천군의 대표적인 교통 인프라는 용천역과 신의주-평양 1급(국도) 도로이다.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개성까지 가는 평의선을 용천역에서 탈 수 있다.

용천군은 대표적인 곡창지대로서 압록강 하구의 비옥한 충적 평야를 바탕으로 벼, 옥수수, 콩, 보리 등을 주로 심고 있다. 땅이 비옥하고 쌀이 좋아서 중앙직속 농장(일명 8호농장)을 만들고 생산된 쌀은 모두 평양으로 보내고 있다.

용천군 신암리에는 신석기, 청동기 등 선사시대 유물들이 출토된 지역과 조선시대에 임경업 장군이 외세와 싸웠다는 용골산성이 있다. 압록강을 끼고 있는 수성리에는 일제강점기의 동제련소 건물이 그대로 있는데, 지금은 기계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천읍에는 양말공장, 용천기계공장, 군양정사업소, 고등 농업전문학교 등 군급 기관들이 있고 '북중 노동자구'에는 내연기관을 전문생산 하는 기계공장과 식료공장, 공업기계기술학교, 토지건설사업소가 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때부터 전력난, 자재난으로 생산이 멈춘 상태이다.

내가 태어나던 때는 전후 복구 때라 유치원도 없었고 전기도 없어서 석유등잔을 켜고 살았다. 옷도 할머니가 짜서 만드신 베옷에 고무신을 신고 책과 노트를 보자기에 싸 들고 다녔다. 마을도 두세 집이 군데군데 모여서 사는 농촌 시골이었다. 문명과 너무 떨어졌지만 유년시절 뛰놀던 정든 고향, 나의 꿈을 키워준 요람이었다.

당시 북한은 노동자들에게는 배급제, 농민들에게는 분배제를 실시했다. 노동자들에게는 매월 2회씩 26일 치를 배급하였고 농민들에게는 노력자와 식구수에 따라 1년 치를 벼로 분배해 주었다. 북한의 식량난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이때부터 이어져 왔다.

비록 가난했지만 사람들이 인정 넘치고 화목했던 고향이었다. 어느 집에 친척이나 손님이 오면 온 마을이 도와주고 함께 기뻐했고 불상사가 생기면 같이 슬퍼하고 위로해 주는 참으로 사랑 넘치는 고향이었다.

그러나 외지의 대학에 입학하며 고향을 떠났고, 고향을 찾을 때마다 식량난은 더 나빠지고 있었다. 나무가 빼곡하던 산은 벌거벗었고 집집마다 땔감이 없어서 고생하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 시작 1년 후 고향에 가보니 이런 상황 속에서 동창생 3명이 세상을 떠나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제2의 고향에서 인생의 후반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지만 나의 살던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있고 지울 수가 없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기고자 개인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