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화장품 트렌드
글. 채수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전문연구원
'뚜껑을 열었더니 인삼 한 뿌리가
통째로 들어있었다.'
출처: 통일부 블로그 https://m.blog.naver.com/gounikorea/222160721878
인삼 한 뿌리의 충격 -
2017년, 화장품 뚜껑을 열다
2017년, 필자는 북한 화장품 64개를 직접 구해 하나씩 화장품을 열기 시작했다. 스킨(북한말 살결물), 로션(물크림), 팩(미안막), 트윈케이크(고체분), 립스틱(입술연지), 향수, 비누, 샴푸, 린스, 비누, 치약까지.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했다. 북한 화장품이라고 하면 으레 살결물 하나, 물크림 하나 정도를 떠올리기 쉽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제품 구성도 스킨·로션 2종 세트부터 5종, 6종, 7종 세트까지 다양했다. 단품보다는 세트 구성이 기본이었는데, 한국의 기초화장품 세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발상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와 실망이 교차했다. 금형 기술이 부족했는지 향수는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내용물이 흘러나와 있었고, 펌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내용물이 올라오지도 않았다. 브랜드명이 인쇄된 금박 라벨은 부분적으로 지워져 있었다. 립스틱은 발색이 흐릿해 제대로 색이 올라오지 않았다. 색조화장품보다는 기초화장품 중심으로 가짓수도 많고 다양했다.
그런데 '금강산 개성고려인삼 생인삼살결물'의 뚜껑을 여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노란색 투명 유리병 안에 인삼 한 뿌리가 고스란히 잠겨 있었다. 한국 에센스라면 '인삼 추출물 몇 퍼센트 함유'라고 라벨에 적고 끝낼 텐데, 북한은 그냥 삼을 통째로 넣었다. 호방하다고 해야 할지, 투박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원산지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개성인삼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이 연구를 후원한 곳은 아모레퍼시픽이었다.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고향이 북한 황해도이다. 그 인연이 닿아 성사된 연구였다. 북한 화장품 64개의 전성분을 분석한 최초의 작업. 박사논문 지도교수님, 박사과정 동료와 함께 북한 화장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 기흥기술연구원에도 방문해 연구진과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쳤다. 그 결과, 성분표에 적힌 것과 실제 들어간 것이 다른 제품이 30%에 달했고, 불분명한 성분이 검출된 제품도 11%였다. 결과는 냉정했다. 기초화장품은 한국의 1990년대, 색조화장품은 1980년대 수준. 그나마 보습 효과는 조금 있었다. 인삼 덕분이었을까.
9년 사이 뭐가 달라졌나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북한 화장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북한 매체들이 전하는 소식만 놓고 보면 확실히 변화는 있다. 크게 라인업 확장, 원료 국산화, 그리고 제재가 만들어낸 역공세 세 가지이다.
먼저 라인업 확장이다. 2017년만 해도 북한 화장품은 스킨·로션 중심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파마크림, 속눈썹성장액, 비듬제거 샴푸, 여드름에 효과가 있다는 팩(미안막), 노화방지크림까지 등장했다.1) 미백, 주름개선, 자외선 차단을 내세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원료가 여전히 개성고려인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여기에 면도전살결물, 면도크림 등 남성용 화장품이 새롭게 라인업에 추가된 것도 눈길을 끈다.2) 화장품이 여성만의 영역이 아니게 된 셈이다.
둘째는 원료의 국산화이다. 신의주화장품공장은 노화방지 성분인 히알루론산을 미생물발효법으로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히알루론산(Hyaluronic acid)은 자기 무게의 1,000배 수분을 끌어당기는 보습 성분으로, 피부 탄력과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데도 쓰인다.3) 2017년 연구 당시에도 히알루론산은 여러 제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에는 수입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북제재로 해외 원료 수급이 막히자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4) 향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2017년 당시 향수와 화장품은 인공적인 향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북한 평양화장품공장에서 천연향료를 이용한 기능성 세수비누를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히알루론산 자체 생산과 마찬가지로 제재가 오히려 천연 원료 개발을 앞당긴 셈이다.
셋째는 그 원료 국산화가 낳은 역공세이다. 화학 원료 수입이 막히자 천연 원료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천연"과 "전통"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신의주화장품공장은 지난해 그 이미지를 수출 무기로 삼았다. 한복 모양을 본뜬 프리미엄 수제 비누를 수출 전용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산 설비를 들여와 별도 공정을 꾸리고, 중국 단둥과 옌타이 시장에 ‘전통 수공예 제품'으로 유통하고 있다. 가격은 기존 인삼 비누의 두 배.5) 제재를 가한 쪽은 북한 경제를 옥죄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은 그 압박을 브랜딩의 자산으로 바꿔낸 셈이다. 단, 이 모든 이야기는 북한 매체가 전하는 내용이거나 외부에서 관찰한 것이다. 실제로 품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9년 전처럼 직접 뚜껑을 열어봐야 진짜를 알 수 있다.
화장품으로 읽는 북한 경공업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화장품을 진지하게 밀었다. 2015년 2017년, 직접 평양화장품공장을 현지지도하며 "세계 최고의 화장품을 만들라"고 지시한 바 있으며,6) 2017년 평양화장품공장은 연건축면적 2만 9,200여㎡으로 리모델링되기도 하였다.7) 지도자가 직접 샤넬, 디올, 랑콤, 시세이도 제품 138종을 구해 공장에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분석하고, 따라잡으라는 뜻이었다. 지도자의 화장품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2018년에는 평양화장품공장이 외신까지 불러 공장을 공개했다. 마침 그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으로 분위기가 풀렸을 때였다. 평양화장품공장 수석 엔지니어는 기자들 앞에서 "우리 제품이 샤넬과 묵묵히 경쟁 중"이라고 선언했다.8) 핵과 경제를 동시에 잡겠다는 병진노선의 한 축에 화장품이 있었다. 그 위상은 선물정치에서도 드러난다. 2016년 노동당 제7차 당대회 참가자들에게 안긴 선물보따리 안에는 텔레비전, 당과류, 고급 술 세트, 오리털 이불과 함께 은하수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9) 북한에서 선물보따리 증정은 지도자의 충성엘리트에 대한 보상과 사랑을 연출하는 정치적 행위인데 그 안에 화장품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생필품이 아니라 국가가 자랑하는 고급품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다. 위에서는 화장품을 그렇게 밀었다.
출처: 통일부 블로그 https://m.blog.naver.com/gounikorea/222160721878
그런데 정작 소비자들의 선택은 달랐다. 2025년 데일리NK 보도에 따르면 북한 20~30대 여성 10명 중 4명은 국산 대신 중국산 '비숑' 화장품을 쓴다. 국산 봄향기·은하수 세트는 130~500위안이지만 중국산은 20~50위안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10) 형편이 되면 국산을 쓰겠지만, 같은 돈으로 중국산을 더 많이 살 수 있으니, 중국산을 선택하는 것이다. 혼수나 선물용으로는 비싼 국내산이 체면이 서지만, 매일 쓰는 건 현실이 먼저이다. 한편, 부유층 돈주들은 샤넬 화장품을 소비한다. 김정은이 이기고 싶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브랜드가 북한 시장에 들어와 상류층에게 팔리고 것이 현실이다.11)
지도자의 의지와 소비자의 선택 사이의 이러한 간극은 북한 경공업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위에서 밀어도, 장마당은 아래서 다른 답을 낸다. 화장품 하나가 그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북한 경공업의 딜레마는 단순하다. 만들 수는 있지만, 북한 주민들은 못 산다.
그래도 당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히알루론산을 자체 생산하고, 천연향료 공장을 세우고, 한복 모양 수제비누로 중국 시장을 두드린다. 시장에서는 지고 있지만, 기술은 쌓이고 수출은 시작됐다. 필자가 뚜껑을 다시 열어볼 날이 다시 온다면, 9년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화장품 산업에 발전이 있었기를 기대한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기고자 개인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