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인사이트

지식의 영향력으로 여는
남북 보건의료 협력

글. 이요한 고려대학교 한반도보건사회연구소
소장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지금 남북 보건의료 협력은 불가능한가? 우리는 흔히 협력을 마주 앉아 합의하고 함께 사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협력의 의미를 훨씬 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공식적인 접촉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참고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지식과 기준, 모델과 경험을 만들고 축적하고 공유하는 것 역시 중요한 협력일 수 있다.

직접 접촉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이런 방식의 협력은 더 현실적이고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앞으로의 남북 보건의료 협력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이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은 새로운 모델로 구상할 필요가 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북한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북한은 지금 보건의료 분야에서 매우 강한 변화와 개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북한 최고지도자의 발언을 보면, 그 변화를 실제로 이끌어 낼 인력의 수준, 곧 역량과 경험, 기술과 노하우의 부족이 반복해서 지적된다. 재정과 자원의 부족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역점 사업인 지방병원 건설사업과 관련해서는 병원 건물 짓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병원이 제대로 기능하는데 필요한 것들, 즉 진료체계, 감염관리, 환자정보 관리, 약품과 자원 배분, 보건행정과 통계, 인력 운영과 교육 등을 어떻게 내실화할 지가 그들에게는 막막해 보이는 것 같다. 병원건설 정책이 추진될수록, 그 뒤를 받쳐 줄 기술적·지식적·운영상의 노하우와 경험, 그리고 검증된 기준과 모델에 대한 수요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 AI 활용 이미지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북한이 자기 체제 안에서 실제로 접목하고 적용하고 활용해 볼 수 있는 각종 표준과 지식, 모델을 정교하게 개발해 내는 일이다. 그것도 단순한 아이디어 수준이 아니라, 실제 현장 적용 가능성이 높은 수준이어야 하며, 가능하면 국제표준에 맞게 설계되고 제시될수록 좋다. 그래야 북한도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 받아들일 수 있고, 국제사회 속에서도 보편성을 가진 지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자원 환경에서도 운용 가능한 병원정보화 모델, 안정적인 전자의무기록 체계, 감염병 감시 시스템, 필수 보건지표 중심의 정보관리 구조, 의료인력 교육훈련 모듈, 병원 운영 표준 매뉴얼, 의료 AI 활용 원칙과 안전기준, 보건의료 데이터 관리 기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해왔고 또 잘 해왔던 것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러한 콘텐츠를 참고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이런 작업이 시혜적 태도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만을 위한 특별한 체계를 따로 만들기보다는, 국제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검증 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편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 북한에도 참고가 되고, 동시에 다른 저자원 국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의 공공재를 만드는 것이다. 즉, 국제적 공공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지식의 형태가 바람직하다. 이를 국제사회와 함께 만들어 내고, 공개적으로 축적하며, 공공의 플랫폼을 통해 공유한다면 우리가 생색내지 않고도, 북한은 눈치 보지 않고도 상시적으로 참고할 수 있다. 국제학술 논문, 정책보고서, 공개형 참조모델, 오픈소스 설계, 국제회의 발표 등 다양한 형태로 축적될수록 보다 보편적이고 믿을 수 있는 국제적 공공재로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 나서서 무엇을 주장하는 방식보다, 국제사회와 함께 수준 높은 콘텐츠를 조용히 생산해 세상에 놓아두는 방식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 북한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AI, IT, 디지털 분야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접점이 될 수 있다. 북한이 강력하게 바라는 보건의료의 현대화는 이제 디지털화 없이 상상하기 어렵다. 환자 정보의 체계적 관리, 약품과 장비의 관리, 감염병의 보고와 감시, 병원 운영의 효율화, 지역과 중앙의 정보 연결, 나아가 인공지능을 활용한 의사결정 보조와 데이터 분석까지 모두 디지털 기술과 맞닿아 있다.

직접 협력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북한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내용을 북한과 같은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보편적 모델로, 그리고 가능하면 국제표준에 맞는 수준 높은 형태로 꾸준히 제시하는 방식이 효용성이나 영향력 측면에서는 더 타당할 수 있다. 북한이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인력과 역량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우리가 국제사회와 함께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생색내기식 접근이 아니라, 북한이 상시 참고할 수 있고 국제사회도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 내는 일, 그것이 지금 가능한 현실적이고도 품격 있는 협력의 방식일 수 있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기고자 개인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