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 제 4 편
함경남도 함흥시
북한 최대 공업도시, 함흥
함흥은 함경남도 도청 소재지로 북한에서 가장 큰 공업도시이다. 함흥이 북한 최대의 공업도시로 불리는 이유는 화학공업, 비료공업, 섬유공업, 제약공업, 기계공업 등 유기·무기화학 공업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주체 섬유'라고 부르는 화학 섬유인 '비날론'을 생산하는 <2.8비날론연합기업소>, 농사에 필요한 질소비료 생산의 핵심 역할을 하는 북한 최대의 비료생산기지인 <흥남비료연합기업소>, 북한의 중요한 핵심 기계 생산기지로 대형 산업 설비와 기계를 생산하는 <룡성기계연합기업소>, 함흥·흥남 공업지대의 금속공업 핵심 기지로 비철금속 제련과 화학 원료 생산을 담당하는 <흥남제련소> 등과 <함흥공작기계공장>, <성천강화학공장>, <함흥제약공장>, <성천강전기공장>, <함흥모방직공장> 등 한국의 대기업에 준하는 기업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철도와 항만, 풍부한 전력, 대규모 노동력 덕분에 함흥은 북한 동해안 최대 섬유 공업권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대기업들이 있는 도시답게 출퇴근 시간엔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는 도시로 통근열차의 지붕 위까지 사람이 타고 다녀서 영화 촬영 현장을 방불케 하는 일상이 매일 같이 연속되는 곳이기도 하다.
함흥의 공업지대를 떠받쳐 주는 핵심 항구인 흥남항은 북한에서 동해안의 대표적인 산업 항이다. 흥남항은 다른 항구와 달리 주변의 비료공장, 화학공장, 제약공장, 철도망, 저장시설이 밀집해 있어 생산품 운송에 매우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함흥은 공업도시 이미지가 강하지만, 함흥 주변에는 바다와 산, 강이 함께 있는 자연환경도 아름다운 곳이다. 동해와 가까워 항만과 해안 경관이 발달해 있다. 서호해수욕장(김일성 특각이 있음), 마전해수욕장이 있는데 마전해수욕장은 관광자원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함흥의 상징,
반룡산(동흥산)과 성천강
함흥 시내 중심부에 솟아 있는 반룡산(盤龍山)/동흥산(東興山)1)은 함흥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산이 아니라 "도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반룡(盤龍)"은 "서린 용", 또는 "몸을 틀고 누운 용"이라는 뜻으로, 멀리서 보면 산줄기가 용이 구불구불 몸을 감고 있는 형상처럼 보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반룡산(동흥산)은 해발 약 319m로 함흥시내 중심부에 솟아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함흥시가지와 함주별, 성천강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함흥의 상징적인 산이다. 반룡산(동흥산)에서는 함흥 시내의 넓은 거리, 공장지대와 주거지, 만세교, 멀리 동해 방향의 평야가 한눈에 펼쳐진다. 특히 도시를 감돌아 흐르는 성천강은 함흥평야(함주벌)와 도시가 함께 어우러진 넓은 조망이다. 반룡산에는 오래된 역사 유적들도 많지만, 함흥동물원이 있고 인공폭포 주변으로 공원이 예쁘게 조성되어 함흥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업도시 함흥을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으로 신혼부부의 사진 촬영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반룡산(동흥산)에는 9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구천각이 있다. 긴 역사만큼이나 구천각은 단순한 옛 건축물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역사가 겹쳐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함흥시를 감돌아 흐르는 성천강은 공업용수, 농업용수, 생활용수로 활용도가 높은 중요한 강으로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발원하여 함흥과 함주 벌판을 적시고 동해로 흐르는 길이 약 100km 정도로 알려진 강이다.
또 함흥 본궁은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된 뒤 자기 조상들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집을 짓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본궁이라 부르며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다.
1) 1971년에 동흥산으로 변경,
함흥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도 있음
고난의 행군과 도시의 변화
고난의 행군 이전에 함흥은 '고양이 뿔만 빼고 다 있다'(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공산품이 함흥에서부터 퍼져나가면서 북한에서도 비교적 생활수준이 높은 편에 속했고 노동자와 기술자 계층이 많으며 배급도 지방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여가생활도 즐길 수 있었었다. 특히 동해안의 마전해수욕장과 서호해수욕장 이용도 많았고, 반룡산(동흥산)에서 휴가를 즐기기도 했었다.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후반)이 시작되면서 북한 최대의 화학공업 중심지인 함흥은 북한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도시 중의 하나이다. 함흥은 화학, 비료, 섬유, 제약, 기계공장 등이 집중된 곳이어서 원유 공급 감소, 전력 부족 등으로 공장 가동이 자주 중단되고 특히 인구가 많은 대도시였기 때문에 식량 부족의 영향은 엄청 컸다. 특히 식량 배급 체계 붕괴는 함흥에도 수많은 문제를 만들었고, 북한 경제를 자발적으로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후퇴시키는 큰 사변과 같은 일이 밀려왔었다. 북한 전역이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겪으며, 경제·사회적 위기 극복을 위한 국가적 동원 시기로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장마당 활동에 의존하면서 노동자들도 출근보다 생계 활동에 더 치우치게 되었다.
함흥도 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생존능력으로 장마당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도시로 꼽힌다. 성천강구역에 위치한 삼일시장(당초 매일 장이 섰던 곳) 등을 중심으로 시장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공업도시에서 북한의 대표적인 상업 도시 중 하나로 변화했다. 함흥의 고난의 행군 시기는 단순한 식량난의 시기만이 아니라, 계획경제 중심의 공업도시가 시장경제적 생존방식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 전환기이기도 했다.
"고난의 행군"을 겪은 후 함흥은 이전과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부분적으로 장마당을 일부분 이용하던 단계에서 국가 배급 체계가 마비된 이후 주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마당으로 크게 발달했다.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거의) 없어졌으며 현재는 국가 배급보다 시장 거래에 의존하는 가구가 많이 늘어난 계기가 되었다.
고난의 행군전에는 "화학공업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엔 산업도시 특유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국제 제재와 국경 통제로 경제 성장이 제한됐다. 다만, 중국과의 교역이 북한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최근에는 휴대전화 사용자가 증가했다고 한다. 정리하면,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시장경제 요소가 확대되고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식량·에너지·경제 제약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움으로 남은 고향, 함흥
정든 고향을 떠나온 지도 어느덧 29년이 넘어선다. 그 땅에서 32년을 살았는데 그때의 고향과 현재가 모든 면에서 얼마나 변했는지를 실감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과 코로나로 국경 봉쇄 등을 통한 생과 사를 경험하면서 주민들은 더 이상 국가의 배급에 의존하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 말 그대로 '자력갱생'을 할 수 있는 '악바리'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을 인식시켰다고 생각된다.
32년간의 고향 추억은 중국과 한국에서의 생활 속에 세월과 더불어 그토록 선명하게 그려지던 고향 산천과 함께 뛰놀던 어릴 적 친구, 꿈속에서도 보고 싶던 부모 형제의 얼굴도, 학창 시절 친구들 모습도, 집에서만큼은 천국 같았던 가정 속의 풍경도 자꾸만 희미하게 흐릿하다.
한 장밖에 챙기지 못한 반룡산 구천각 앞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가족들과 무더운 여름에 마전해수욕장, 서호해수욕장에서 함께 뛰놀던 그 시간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흘러간 세월 속에 변해버린 모습을 생각해 보면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소식조차 전할 길 없는 부모·형제들에게 그 흔한 안부조차 한 마디 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행복했던 옛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할수록 손바닥 안의 모래알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우주보다 가장 먼 고향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려와 감히 생각조차 하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이다. 그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그 시절의 따뜻한 온기는 여전히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참고로 북쪽에 "함흥 얄개"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정도로
억세고 강하다는 뜻이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기고자 개인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