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치료제 삭제가 보여주는
북한 국가책임의 변화
글. 이우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북한이 최근 개정한 헌법에서 보건의료 분야와 관련해 눈에 띄는 변화가 확인된다. 기존 헌법에 담겨 있던 '전반적 무상치료제', '의사담당구역제', '예방의학제도'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그 대신 '사회주의보건제도를 발전시키고 의료봉사의 질을 개선하며 보건부문의 물질기술적 토대를 강화한다'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다. 얼핏 보면 오래된 제도명을 시대에 맞게 정리한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헌법이 국가가 주민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어디까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문서라는 점에서 보면, 이번 변화는 단순한 문구 수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북한 사회주의 헌법 보건의료 조항 비교
| 기존 헌법(제56조) | 개정 헌법(제49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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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공고발전시키며 |
국가는 사회주의보건제도를 공고발전시키며 |
기존 헌법에 담겨 있던 무상치료제는 국가가 주민의 치료비를 책임진다는 약속이었다. 의사담당구역제는 지역 단위에서 주민 건강을 관리하겠다는 제도였고, 예방의학제도는 질병이 생기기 전에 국가가 미리 주민 건강을 돌보겠다는 원칙이었다. 이 세 가지는 북한이 스스로를 "주민 건강을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주의 보건국가"로 설명할 때 핵심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개정에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제도명이 빠지고, 대신 의료서비스의 질, 병원과 장비 같은 보건 인프라, 보건제도의 발전이 강조되었다. 결국 "국가가 주민의 치료와 건강을 직접 책임진다"는 약속은 뒤로 물러나고, "국가가 의료체계를 정비하고 개선한다"는 방향이 더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의료 현실과
정책 방향의 조정
이러한 변화는 북한의 의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은 오랫동안 무상치료제를 사회주의 체제의 장점으로 내세워 왔지만, 주민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의료 현실은 그 약속과 거리가 있었다. 병원에는 약품과 의료장비가 부족했고, 주민들은 필요한 약을 장마당이나 개인약국에서 직접 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료 자체는 무료라고 하더라도 약값, 주사기, 수액, 의료 소모품 비용은 환자와 가족이 부담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헌법상으로는 무상치료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이미 주민 부담이 커져 있었던 셈이다.
평양종합병원 전경 (AI 활용 이미지)
여기에 장기간의 경제난과 대북제재, 코로나19 시기의 국경봉쇄, 외부 지원 축소가 겹치면서 북한 의료체계의 부담은 더 커졌다. 의약품 생산 기반은 취약하고 지방 병원은 낡아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모든 주민에게 실질적인 무상의료를 제공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이번 헌법 개정은 북한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전면적 무상치료'의 약속을 직접 강조하기보다, '의료시설 개선과 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앞세우는 방향으로 국가책임의 성격을 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흐름은 김정은 시대 보건정책과도 맞닿아 있다. 김정은 정권은 평양종합병원 건설, 지방병원 현대화, 제약공장 정비, 의료서비스 질 개선 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사업은 보건의료 인프라 개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주민 개개인에게 의료를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접근이라기보다 국가가 병원과 제약시설, 의료장비 같은 기반을 정비하고 이를 정책 성과로 보여주는 방식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북한의 보건정책은 주민의 건강권 보장보다 시설 개선과 관리 역량, 정책 성과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비용분담 확대와
건강권 약화 가능성
최근 북한에서 거론되는 보건보험기금도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에서 볼 필요가 있다. 보건보험기금은 국가 예산만으로 의료비를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기업소, 개인 등 여러 주체가 의료 재원을 함께 부담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기존 헌법에 '전반적 무상치료제'가 명시되어 있었다면 주민이나 기업소에 의료비를 부담시키는 방식은 공식 이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정 헌법에서 무상치료 원칙이 사라지면서, 북한 당국은 앞으로 국가 예산뿐 아니라 기관·기업소 부담, 주민 부담, 외부 지원 등을 결합해 의료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히게 되었다. 이 점에서 보건보험기금은 이번 헌법 개정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진행되고 있던 국가책임 축소와 비용분담 확대가 제도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가깝다. 북한 보건의료의 방향이 "국가가 모두 책임지는 방식"에서 "국가가 관리하되 비용은 여러 주체가 나누어 부담하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무상치료제뿐 아니라 예방의학제도와 의사담당구역제도 함께 삭제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예방의학은 국가가 질병을 미리 막겠다는 원칙이고, 의사담당구역제는 지역 단위에서 주민 건강을 일상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제도였다. 따라서 이 표현들이 헌법에서 빠졌다는 것은 북한 당국이 주민 건강을 무상으로 치료하고 생활 단위에서 예방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기존 약속을 더 이상 구체적인 제도명으로 강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물론 북한이 앞으로 방역이나 위생 관리를 중단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감염병 대응과 방역 규율은 계속 강조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성격은 주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예방이라기보다, 국가의 위기관리와 사회통제를 위한 예방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주민 건강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평양과 핵심계층은 상대적으로 나은 의료시설과 의약품에 접근할 수 있겠지만, 지방 주민과 취약계층은 약품 부족, 낡은 의료시설, 비공식 비용 부담에 계속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는 사회주의보건제도와 국가책임을 말하더라도, 실제 운영에서는 지역과 계층에 따른 의료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남북 보건협력의 시사점
이러한 변화는 한국의 대북 보건의료 협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금까지 남북 보건협력은 감염병, 백신, 결핵, 말라리아, 영유아·임산부 지원, 의약품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러한 지원은 필요하다. 다만 이제는 단순히 무엇을 지원할 것인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북한이 보건의료 비용을 여러 주체에게 나누어 부담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면, 외부 지원이 취약계층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북한 당국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흡수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보건협력은 지원 품목보다도 그 지원이 실제로 누구에게 도달하는가를 핵심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약품이나 백신을 보내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방 주민과 취약계층에게 실제로 전달되는지, 지역 간 의료 격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지, 지원 물자의 최종 수혜자를 확인할 수 있는지, 전달체계의 투명성이 확보되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결국 이번 헌법 개정에서 사라진 것은 몇 개의 보건의료 용어만이 아니다. 사라진 것은 국가가 주민의 건강을 무상으로, 예방적으로, 생활 단위에서 책임지겠다는 약속의 언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의료서비스 개선, 보건 인프라 강화, 관리와 성과의 언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정은 북한 보건의료 체계의 변화이자, 김정은 시대 국가책임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기고자 개인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