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 제 6 편
평안남도 덕천
내가 살던 평안남도 덕천시는 대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도시로, 북한에서 중요한 지역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덕천시에는 12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진 댐이 있는데, 이 댐이 중요한 이유는 수문 12개를 모두 개방할 경우 평안남도 전체가 잠길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물을 가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덕천시는 무장 경비를 설 정도로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덕천시를 흐르는 대동강은 상류 및 중상류 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북한 중부를 흐르는 큰 강으로 평안남도 지역을 지나 평양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덕천 일대에는 대동강 물길을 이용한 수력발전 시설인 대동강 발전소가 있습니다.
또한, 덕천시에는 대표적인 공업시설인 승리자동차공장이 있으며, 이 공장은 1958년 소련의 지원으로 건설되었습니다. 대표 생산 차량인 승리 58호 2.5톤급 화물차를 연간 약 3만 대 생산하고 있으며, 화물차뿐만 아니라 각종 특수·군용 차량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군사시설로는 북한의 특수부대인 11군단(일명 폭풍군단)이 있으며, 북한의 대표적인 특수작전부대로서 정찰, 침투, 후방 교란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군단입니다.
특히 덕천 지역에는 덕천탄광, 제남탄광, 형봉탄광, 남양탄광 등 여러 탄광이 자리 잡고 있으며, 덕천지구탄광연합기업소가 여러 탄광을 묶어 관리하는 형태입니다. 이처럼 덕천은 대동강 상류의 탄전 지역과 승리자동차공장 같은 대규모 공업시설이 함께 있는 북한의 주요 공업도시입니다.
- 탄광 예시 이미지
고난의 행군 이후 달라진
내 고향 덕천시
고난의 행군 이전만 해도 승리자동차공장에서 근무하던 종업원 수는 2만 5천 명에 달했으며, 그 외 석탄 탄광과 수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국가에서 배급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덕천시는 대규모 일터가 자리 잡은 도시였습니다. 덕천시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승리자동차공장에서 배급을 받으며 살아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급이 끊기면서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에 계속 출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승리자동차공장은 자동차와 군수물품, 가마솥과 대야 같은 생활용품 등을 생산하는 곳이었습니다.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남자들은 공장에 나가지 않으면 단련대로 끌려가 몇 달간 강제노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장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들은 가마솥, 대야, 술통 등을 등에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 식량을 마련했습니다. 부모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부모님을 돕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포기하고 장사를 따라다니면서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고된 일이었지만, 저 역시 다를 바 없이 부모님과 함께 자물쇠나 가마 등 부피가 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장사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북한 회창군의 금광에도 갔습니다. 금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삭도를 타고 수직으로 60미터를 내려간 뒤, 약 1시간 동안 '오소리굴'이라 불리는 곳(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을 지나야 금을 채취할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저희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춥고 어두운 동굴 안에서 2주 동안 찬밥과 반찬을 먹으며 금을 채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금을 캐기 위해 화약을 설치하다가 오발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거나, 굴이 무너져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자리였습니다. 저 역시 금을 캐고 며칠 동안 모은 짐을 운반하던 중, 함께 일하던 동료가 실수로 무거운 금광석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허리를 다쳐 몇 주간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저는 22살까지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덕천시의 승리자동차공장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평소 자동차에 관심도 많았기 때문에 자동차양성소라는 직업전문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졸업했습니다. 유년 시절에는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대동강이 있어 더운 여름이면 친구들과 함께 수영을 즐겼습니다. 운동을 좋아해 축구와 탁구 등을 하며 즐겁게 놀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한국에 입국한 지 14년째이지만 좋은 차를 타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아직도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굶주리고 있을 친구들이 생각나 가슴이 아픕니다.
"언제면 그리운 친구들도 지금 나와 같이 자유를 누리고 먹을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보고 싶은 친구들아, 아직도 너희들과 함께 철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이 그립구나. 이제 다시 너희들을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리운 너희들을 만나는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성장하며 기다리고 있을게. 너희들도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언젠가 서로 만나기를 바란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기고자 개인의 견해입니다.